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시대다. ‘듣기’보다는 ‘말하기’가 먼저이고 주체와 주제는 언제나 스스로인 시대. 대화 속에 미묘한 경쟁이 숨어있고 마무리는 언제나 나의 승리로 끝나야 하는 이기적인 소통.. 아니 소통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어떤 행위.
그 행위들 속에서 나는 ‘보’였거나, ‘보’이거나 혹은 ‘보’일지도 모르는 상태로 살아왔다.
영화 속 ‘보’는 편집증이 있는 환자로 예약된 시간에 의사와 상담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챙겨 먹는다. 약을 먹지 않은 스스로는 신뢰하지 못하지만 ‘물’과 함께 먹으라는 의사의 말은 필사적으로 믿는다. 앞의 두 가지 행위를 빼고 나면 보를 돕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잠시 문을 열어뒀다고 집 열쇠가 사라지고 약을 먹기 위해 틀었던 ‘수도’는 잠겨있고,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필요한 카드는 막혀버린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는 ‘보’의 불행을 아들의 탓이라 돌리고, 집은 노숙자들에게 점거당하고 찰나의 순간 살인자가 되었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 그의 하루.
세상의 모든 불운을 떠안고 거듭 새로운 불행을 마주하게 되는 ‘보’의 상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피를 말리게 한다. 그리고 너무나 슬펐다. 그가 겪은 사건들은 누군가의 아주 작은 도움만 있었더라면 해결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도움이란 건 결국 ‘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보는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고 거짓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다만, 말이 좀 어눌하고 늘 주눅 들어있는 상태였을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 가운데 아무도 ‘보’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봐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보’ 스스로도.
경험해보지 못한 ‘보’의 사건들에서 자꾸 내가 보였던 건, 아마도 그 이유에서겠지. 살아가면서 해온 수많은 말들 가운데 나 아닌 상대가 기억하는 문장은 몇 가지나 될까. 내가 느꼈던 패배감과 고립감. 그리고 공포. 이런 고백마저도 상대의 이야깃거리로 쓰일 걸 알면서도 절실하게 입을 여는 나는, ‘보’였거나 ‘보’이거나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