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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3.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여덟 걸음


 “와, 씨. 떡대…쟤 티비에서 파이트 뜨는 거 봤어? 오져.”


 애들이 장미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쟨 또 뭐냐. 나무젓가락 부러뜨린 줄. 설마 저걸 도와달라고 끌고 온 건 아니겠지?”


 “쟤 걘데? 쟤 정유성 여친이잖아.”


 “걔가 그게 한둘이냐? 며칠 지나면 또 전여친 돼 있어.”


 “아니야. 너 못 들었냐? 정유성 쟤한테 눈깔 돌았다잖아.”


 “걔가 쟤야? 아이씨. 야 전성혁, 하나만 올거라매!”


 “닥치고 있어봐, 좀!” 전성혁이 소리쳤다.


 “아 씨, 나 유성이 좋아하는데.” 


 “나도 친한데.” 


 “쟨 또 왜 왔냐? 저거 선 넘네.”


 전성혁이 중얼거리는게 들렸다. 


 “야.”


 멀찍이 떨어진채 전성혁이 내게 말했다.


 “니 남친 니 여기 온 거 아냐?”


 “안다고 해.” 


 장미가 나한테만 들리게 말했지만 정유성이 엮이게 하기 싫었다. 


 “정유성이 가지 말랬는데 내가 몰래 나왔어.” 


 장미가 한숨을 쉬었다.


 “왜?”


 여럿이 한꺼번에 물었다.


 “장미랑 친하니까.”


 “그냥 둘이 사귀지 그러냐.”


 어떤 남자애가 말했다. 장미가 몸을 풀었다. 전성혁이 건들거리며 다가와 내 앞에 서서 가래침을 칵 뱉었다.


 “야, 니 오늘 운 졸라게 좋은 줄 알아라. 꺼져.”


 “저기, 우리 싸우지 말고 말로 하면 안될까?”


 “야, 가.”


 전성혁과 장미가 동시에 말했다. 그날 내 인생 전무후무한 용기를 터뜨렸는데 우정의 힘이라기보다 뭘 몰라서 그랬다. 난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외쳤다.


 “장미 대신 날…!”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내 입을 막고 뒤로 끌어당겼다. 


 “야, 야! 성혁아!”


 손의 주인인 정유성이 숨을 헐떡였고 이재원이 이어 말했다.


 “서, 성혁아. 김장미 잘못 없어. 걔 말고 다른 애가 양지아한테 말 전한 거야.”


 “니가 어떻게 알아? 구라면 뒤진다.”


 이재원이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


 “내가 그랬어.”     



          

 “은오야, 3분 후에 시작해.”


 아빠한테 축제 재미없다고 문자를 하는데 합창부 부장 언니가 대기실 문을 열고 말했다. 정유성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백삼십! 헉, 다 왔어. 헉. 지금 도착했어.”


 손에 거대한 인형을 끼우고 머리에는 유니콘 탈을 쓴 정유성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냐?”


 “아니, 형들이랑 누나들이랑 자꾸 불러대는걸 어떡해.”


 “야, 그건 그렇고 아까 동아리 애들이 그러는데 이지형 은새랑 깨졌대.”


 정유성이 입을 으쓱했다.


 “진짜야?” 답답하게 말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은오야, 우리 차례야.” 부장 언니가 문을 열고 말했다.


 무대 왼편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부원들이 무대 중앙에 두 줄로 섰다. 사회자 멘트가 끝나고 반주를 시작했다.


 난 행복합니다. 내 소중한 사랑. 그대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답죠. 


 최신가요를 원하는 부원들을 무시하고 선생님이 쿨 이제훈의 사랑합니다를 축제 공연 곡으로 밀어붙였다.   


 난 행복합니다. 그대를 만난건 이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인거죠.


 고개를 돌려 무대 밑을 봤다. 정유성이 멀리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다가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우릴 갈라놓을지라도,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그날 정유성이 팔을 흔들며 활짝 미소짓는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빛 바랜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축제가 한창이던 점심시간, 빈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데 내 옆으로 소희가 키가 크고 피부가 희고 긴 검정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애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지나갔다.


 쟤야, 소희의 속삭임에 내가 쳐다봤다. 동시에 그 여자애가 날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흘겨보고 지나갔다.


 그래서 뭐래? 소희가 작게 묻는 게 들렸다. 아직 답장 안 왔어, 그 여자애가 말했다.


 2012년 8월 마지막 날, 정유성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정유성 학교 왜 안 와? 전화도 안 받아.”


 엎드려 자는 이지형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지형이 고개를 들어 날 물끄러미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었다.


 “유성이가 얘기 안 했냐?”


 오후에 복도를 걷는데 옆으로 정유성이 나타났다.


 “야,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정유성이 말하고 뒤돌아 가버렸다. 난 종례가 끝날 때까지 하루종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미친듯이 고민했다. 종례 후 5반 앞문 앞에 서서 장미를 기다릴 때였다. 5반에서 이원우가 뛰어나와 내 뒤 누군가에게 폴짝 다가가 소리쳤다.


 “야, 정유성 여친!”


 가슴에 큰 바윗덩이가 내려앉는 소리가 쿵 하고 귓전에 들렸다. 고개를 빠르게 돌려 뒤를 봤다. 이원우가 급식실에서 소희와 어깨동무하고 지나간 여자애에게 말하고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린채 손가락도 꼼짝 않고 서있었다. 이원우도 그 여자애도 날 보지 못한 장미도 사라지고 교실들이 텅 비어도 고개를 숙인채 가만히 서있었다. 복도가 공허하고 고요해져도 그대로 서있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자마자 앞쪽에 있는 정유성 자리를 봤다. 친구들과 웃으며 놀고 있었다. 자리에 앉는데 미나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친구와 우리 반으로 뛰어들어왔다.


 “은오야, 정유성 이지수랑 바람나서 너랑 헤어졌다며?”


 웃었다. 미나는 이어서 조잘댔다.


 “저 새끼 원래 그래. 쟤 헤어질 때마다 그렇게 바람 나서 헤어졌다니까. 아마 이번에도 그럴 거다.”


 “왜, 그래도 이지수는 첫사랑이래잖아.”


 미나 친구의 말에 가슴이 쿡 찔렸다. 난 책상 밑 손을 꼼지락거렸다. 둘은 내 뒤에서 한참 속닥거리며 웃었다. 마음을 잡아 끄집어내서 정유성이란 흔적을 수돗물로 싹싹 씻고 싶었다. 


 “야, 힘내셈.”


 미나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두들겨 맞은 자존심을 되살리는게 절박했다. 난 최대한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안 힘든데.”


 “아, 그래?”


 “나 좋아하는 애 따로 있어.”


 미나와 미나 친구와 주변에서 듣고 있던 애들이 날 쳐다봤다.


 “어어? 누구? 야, 설마…” 


 미나가 말했다.


 “이지형?”


 미나 친구 수진이가 물었다. 내가 쑥스럽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헐! 야!” 미나가 소리치며 정유성에게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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