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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6.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열한 걸음

         

 공사 중이라 열려있는 옥상 가는 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미술실이 있었다. 모두 잠긴 미술실 앞에 서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실 앞은 낙서가 가득한 벽이었다. 그 벽을 마주하고 문 옆에 기대 섰다. 갑자기 애들이 수근거리더니 전부 비켜섰다. 나만 그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몰려서서 막고 있었다.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박정훈이 킥킥대며 유성펜으로 벽에 끄적이자 모두 킥킥 웃었다. 박정훈이 비켜서자 찐따년이라는 글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애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글자를 썼다. 시발년, 개찐따, 개새끼.

 

 “야, 니네 좀 심했다….”


 소희가 중얼거렸다. 그때 미술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다 놀라 그를 쳐다봤다. 정유성이었다.


 “어, 정유성이다.”


 “어, 유성아. 미술실 잠긴 거 아니었어?”


 “안 잠겼어. 잡아당기면서 열어야 돼.”


 잠긴 목소리로 정유성이 대답했다.


 “너 왜 거기서 나오냐?”


 “잤어.”


 그 말이 아주 웃기다는 듯 모두 와하하 웃었다. 정유성은 가만히 서서 벽과 나와 애들을 번갈아봤다. 욕을 먹은 것보다 그 상황을 정유성이 본 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야야 유성아, 너도 써. 김은오한테.”


 박정훈이 킥킥거리며 펜을 내밀었다. 정유성이 가만히 펜을 보더니 받아들고 박정훈이 가리킨 내 맞은편 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애들이 달라붙었다.


 “오오오!”


 잠시 뒤 정유성은 펜을 옆에 있던 김지우에게 대충 건네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애들이 얼른 양쪽으로 갈라져 기대되는 미소로 날 봤다. 난 정유성이 내 마음에 쓰고 간 한 마디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꺼져 내 인생에서     





 선생님은 쉽게 조퇴서를 끊어줬다. 약국에서 약을 샀다. 약을 들고 하릴없이 걷다가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았다.


 시간이 흘러 해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했을 때 천천히 일어나 걸었다. 세상에 노란빛이 가득하고 공원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정유성을 좋아하게 되었던 날과 똑같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 실루엣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눈이 마주쳤고 지나갔다. 난 걸어가다가 멈춰서 멀어지는 정유성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마지막 수업이었다. 자습이었지만 대다수가 떠들고 놀았다. 난 몰래 안 낸 핸드폰으로 아빠한테 문자를 보냈다.


 보고싶어. 나 그냥 아빠 따라 가고싶어.


 액정에 떨어진 물 한 방울을 멍청하게 보고 있다가 등에 닿는 타격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정훈이 장구채를 양손에 들고 낄낄댔다.


 “하지마.”


 “장구가 말을 하네?”


 감탄하며 궁채와 열채를 한 손씩 들고 번갈아 내리치길 계속했다.


 “하지말라고.”


 “싫다고.”


 애들이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며 낄낄 웃었다. 열채가 등에 닿을 때마다 아팠지만 궁채의 동그란 끝부분이 세게 내리칠 때마다 특히 아팠다.


 “하지말라고!”


 세 번째 소리쳐도 소용없자 벌떡 일어났다. 의자를 들어 박정훈에게 던졌다. 콰당탕, 둔탁한 소리가 교실을 잠재웠다. 모두 입을 다물고 시선을 집중했다. 박정훈은 의자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난 다가가 머리채를 잡고 들어 벽에 쾅 박았다. 교실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소리쳤다.


 “오경아 좋아하면 좋다고 고백을 해. 비겁하게 굴지 말고!”

 교실은 조용했다. 내 얼굴이 열이 올라 벌건 게 느껴졌다.


 “야, 괜찮냐?”


 윤소라가 고요를 깨고 다가와 의자를 걷어치우며 박정훈에게 말했고 이내 전체가 집합했다. 박정훈은 격려하는 애들에 사지가 붙들려 보복하지 못해 분통을 터뜨렸다. 오경아가 내 옆으로 왔다.


 “놔. 사람 머리 함부로 만지는거 아니야.”


 내게 낮게 말하며 어른스럽게 충고했다. 내 손을 박정훈 머리에서 떼어내려 시도했다. 실패하자 막연하게 손등을 찰싹거렸다. 옆으로 돌아서서 날 쳐다보고 크게 말했다.


 “니가 이러니까 우리가 널 싫어하는거지, 씨발년아.”


 난 박정훈만 노려봤다.


 “손 떼!”


 “손 떼라고.”


 “놓으라고!”


 다 같이 소리 지르며 붙을 때 얄밉게 손을 반짝 놓았다. 여러 목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인 비난이 큰소리로 쏟아부어졌다.


 “야야, 그만해. 쌤, 쌤…”


 “뭐하는 짓이야!”


 음악 선생님이 다가와 눈썹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쌤, 아니 김은오가요, 갑자기 정훈이한테 의자를 집어던지고 욕을 해서….”


 모두 물러서고 선생님이 내 앞에 섰다.


 “너 뭐야, 어디서 싸움을 해!”


 난 정신 없이 헉헉대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죄,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선생님이 내 발밑에 떨어진 장구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주워.”


 얼굴에 범벅된 눈물을 닦으며 허리를 굽혀 장구채를 주웠다. 선생님이 차갑게 날 쳐다봤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죄, 죄, 송합니다.”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삿대질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 내가 지켜볼 거야. 조심해. 알았어?”


 “네.”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선생님이 혀를 쯧 차며 돌아 앞으로 가고 모두 흩어져 자리에 앉았다. 몸이 심하게 떨렸다. 이빨과 손이 방정맞게 떨리고 숨이 계속 몰아 쉬어졌다. 박정훈이 자리로 가면서 벌건 얼굴로 눈가가 젖은 채 말했다.


 “끝나고 나와라, 시발년아.”


 들은 애들이 키득거렸다.


 “김은오 이제 뒤졌다.”

 

 “누가 이길까?”


 “에이, 정훈이가 이기지.”


 수업시간 내내 시계만 쳐다봤다.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공포에 목이 졸렸다. 책상 위에 놓인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몰아쉬어지는 숨소리가 들릴까봐 코와 입을 막고 숨을 눌렀다.


 종이 치자 다 몰려나가며 벌어질 싸움에 대해 떠들었다. 난 천천히 책과 필통을 들고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나갔다.


 “야야, 온다! 온다!”


 교실 앞에 다른 반 애들까지 왁자하게 몰려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며 하나라도 좋으니 내 편이 있기를 바랐다. 전부 박정훈 뒤에 진을 치고 있는 그 복도에서 어렴풋한 눈빛만 보내주는 하나라도 있다면 모든 스트레스에서 구원해주는 동아줄이 될 것 같았다. 난 억척스럽고 현명한 영화 주인공이 아니었다. 똑 부러진 해결을 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도움을 바라는 나약하고 답답한 열여덟 살이었다.


 박정훈이 악에 받쳐 씩씩대고 있었다. 무시하고 교실로 들어가는 내 멱살을 우악스럽게 붙들어 올렸다.


 “어디 한번 쳐 봐. 아까처럼 쳐 봐!”


 애들이 함성을 올렸다. 박정훈이 주먹을 들었다. 난 반사적으로 주먹을 만들어 소용없을 줄 알지만 눈을 질끈 감고 허공을 향해 빠르게 뻗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눈을 살짝 떠보자 박정훈이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난 의아하게 내 주먹을 쳐다봤다. 그때 선생님이 나타났다.


 “너 이 새끼 뒤지고 싶어!”


 체육 선생님이 박정훈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리며 소리치자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난 교실에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와 도망쳤다.


 복도를 지나다가 상담실 앞에서 멈췄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생님이 컴퓨터 앞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녹색 소파에 앉았다. 선생님은 컴퓨터 밖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도와주세요. 애들이…”


 선생님이 컴퓨터 옆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저기, 은오야, 그…너가 잘하면 되는 거야. 사람은 먼저 자기가 변하면 주변이 변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네.”


 고요한 상담실에서 째깍째깍 시계 소리를 들으며 긴 바늘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한참 앉아있었다.


 “아, 선생님. 진짜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그래! 그렇다니까. 너가 잘하면 되는 거야. 잘 가. 나중에 또 와.”


 “감사합니다.”


 나가서 문을 닫고 고개를 들어 상담실 팻말을 쳐다봤다. 늘품교실.


 “야, 김은오 어디 갔냐?”


 “무서워서 토낌.”


 모퉁이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 반대편으로 걸었다. 집에 가기 싫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영원히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때 공사 중인 옥상 문이 열려있던 게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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