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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im Oct 25. 2023

세상 초라한 점심

한국인의 밥심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새참 풍속이다. 육체노동이 심한 노동자나 농번기의 농부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인 새참은 일을 하는 도중에 잠시 먹는 음식이다. 18세기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풍속 중 하나인 이 새참은 힘든 일을 하는 이들에게 기운을 나게 하는 음식으로 바쁜 농번기의 농부들은 하루 세끼 식사 이외에 두 번의 새참을 더 먹었다고 한다.    


나는 전공상 필드 트립을 종종 간다. 한국의 새참 문화 속에서 커서 그런지 나도 노동을 할 때에는 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에너지가 떨어질 때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을 챙겨 다니고, 일이 끝나면 힘이 나는 음식을 먹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에는 선배들이 항상 끼니를 챙겨주었다. 내가 리더가 되어 학생들을 데리고 나갈 때에는 다른 건 못 해줘도 먹는 것만큼은 최대한 잘 먹이려고 애를 썼다. 끝나면 맛있는 거 먹자고 서로 다독이며 재미나게 다녔다. 아마도 노동의 대가는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음식이다'라는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미국에서 필드 트립을 가면서이다. 미국에서 첫 필드 트립을 가는 날, 각자 점심을 싸 오라고 했다. 근처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한 곳이기도 했고, 저녁은 가족과 보내야 하는 미국이니 빨리 일을 끝내려면 간단히 먹어야 보나 했다. 그래도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인 나는 샌드위치로는 힘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도시락을 쌌다. 속은 든든하지만 간단히 먹을 수 있도록 볶음밥을 베이컨에 말아서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베이컨말이주먹밥을 준비했다. 

베이컨말이주먹밥

두 시간 걸려 도착한 우리는 목적지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길이 없는 곳이라 커다란 판자를 들고 가며 길을 만들면서 갔다. 한참을 걸어가 현장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측정해야 할 것들을 측정하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 즈음 드디어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싸 온 음식을 먹는 점심시간이다. 다른 아이의 도시락 반찬이 궁금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배낭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이럴 수가! 예상은 했지만 모두 다 빵이다. 

적어도 나는 양상추와 계란, 토마토 정도는 있는 샌드위치를 예상했다. 


그런데 그냥 저건 식빵이다. 잼이 발라져 있는지 없는지 그것까진 보이진 않지만, 어쨌건 안에 내용물이라고 할만한 것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간 여자 교수님은 사과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딸랑 사과 하나가 그녀의 점심 끝이다. 나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먹고 일을 하지? 평상시에 잘 먹어서일까? 나보다 선천적으로 힘이 센 건 그렇다 치는데 어떻게 점심에 사과 하나 먹고 저런 힘이 나오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입장에서 나름 간단히 싼 도시락이었건만 그들의 빵 하나, 사과 하나와 비교하면 나의 도시락은 최고급이었다. 


심지어 다들 나보다 무거운 것을 번쩍번쩍 들고 갔던 터라 힘도 못쓰는 내가 혼자 너무 잘 먹는 것 같아 결국 나의 도시락은 다 먹지도 못하고 집어넣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다 먹어서 더 먹기도 민망했다. 그렇게 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점심시간이 끝나고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이 되어 연구소로 돌아왔다. 


점심을 세상 초라하게 먹고 더운 땡볕에 무거운 것을 한참을 들고 걸으며 일을 했던 터라 나는 무슨 정신으로 일을 끝냈는지도 모르겠더라. 친구들은 오히려 가볍게 먹고 빨리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도무지 당이 떨어져서 쫓아갈 수가 없었다. 운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과 하나 먹고 일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신체적으로 내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는 좌절감도 있었다. 그렇게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이후 나는 최대한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가벼운 초콜릿을 많이 싸가지고 다닌다. 어쩌면 노동하면 잘 먹어야 한다는 나의 선입견이 나의 에너지를 더 고갈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첫 필드 트립

한국의 새참 문화를 다시 생각해 보니 농부들의 에너지 보충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의 밥심 문화는 이렇게 아내가 남편을, 부모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게 아닐까. 한국 연구원 생활에서도 선배가 서툰 후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였던 것 같다. 


초콜릿으로 어찌어찌 적응은 했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인의 밥심 문화가 그립다. 어떤 일이든 든든히 맛있는 거 먹으면 힘이 나는 체질인 나는 역시 밥심이 필요한 한국인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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