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에 대하여,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오케이 구글. 오늘 뭐 먹지?”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는 날, 어디에 살든 삼시세끼 뭘 먹을지가 가장 고민인 나는 이렇게 구글을 부른다. 대답은 매번 같은 말로 시작한다. “오늘의 랜덤메뉴 뽑아볼까요?”대답이 마음에 안 든 나는 “하나 더!” 또는 “다른 메뉴 골라줘”를 외치다가 결국 화가 나 냉장고로 돌아선다. 그리곤 혼자 생각한다.
‘AI가 하루가 다르게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왜 자꾸 배달 음식만 추천할까? 사용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추천해야 할 것 아니야!’
미국에 살면서 가장 부러운 순간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싶을 때이다. 요새야 도어대시와 같은 딜리버리가 많이 생겼다지만 일단 배달의 필요충분조건은 그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 때 이야기다. 아무튼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다시 뭘 해 먹을까 냉장고를 뒤적인다.
괜스레 AI 핑계를 댔지만 문제는 나의 욕구를 정확히 몰라서 투덜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 뭘 먹고 싶은지 나의 욕구를 안다면 파는 곳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먹을 방법을 찾을 테니까.
지인들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다. 닭발을 좋아하는 친구는 시어머니에게 레시피를 배워와해 먹고, 육회를 좋아하는 친구는 한국 정육점에서 생고기를 사다가 해 먹는다. 이런 친구들 덕분에 나도 가끔 여기에서는 희귀한 음식들을 얻어먹곤 한다. 요리를 좋아하고 즐겨하지 않음에도 미국에 살면서 느는 건 살과 함께 다행히도 약간의 요리 실력이다. 결국 대강 넘길 수 없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요리 실력도 늘리고 있다.
욕구란 단어의 뜻도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지 않은가. 팔지 않는다면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의 원동력 역시 욕구다.
미국의 시인 스탠리 쿠니츠는 말했다.
"삶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도 욕망, 둘째도 욕망, 셋째도 욕망이다."라고.
음식에 탐함이 없는 친구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먹어야 해?” “대단하다”
하곤 하지만 살면 살수록 이 욕구라는 것과 내 욕구를 잘 아는 것이 인생에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매슬로의 욕구 분석에 따르면 음식을 탐하는 생리적 욕구가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지만 나의 고국 음식에 대한 욕구는 나만이 가진 경계인으로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이라고 이해를 구해본다.
모처럼 다시, 구글을 불러봤더니 오늘은 색다른 답을 내놓았다.
“세상엔 군침 도는 음식이 많아요. 그런데 맛을 모르니..”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이 대답이 랜덤메뉴를 선택해 주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아, 드디어 AI가 진화했구나. 모르는 걸 안다는 것. 그건 모든 앎의 시작이니까. 휴머노이드도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으니 어쩌면 AI가 맛을 안다고 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욕망이란. 특히 음식의 맛을 아는 그 욕구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만의 고유의 것이 아닐까 싶다.
히브리어에 안다는 것은 동시에 경험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나의 몸으로 체득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 AI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오늘 뭘 먹을까?’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오늘도 나의 식탐에 대한 변명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