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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는 정림사지였다. 그런데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난다.
왜냐하면 그날은 햇빛이 몹시 쨍쨍하고 더운 날씨였고 우리 부부는 둘 다 더위에 몹시도 취약했다.
사실 나는 추위에도 약하긴 하지만 더위보다는 추위를 조금 더 잘 버티는 편으로 더위는 정말 정신을 못 차린다.
특히나 계속 몸을 움직이는 여행지에서라면 당연히 더위보다는 추위를 선택하는 편이기는 하다.
물론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날씨라면 제일 좋겠지만 기후재앙으로 인해 더더욱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날씨 속에서 사람이 적응해야지 하는 수 있나..
정림사지는 넓고 아름다웠겠지만 그냥 눈부시고 덥다는 기억만 단편적으로 남아있고, 실내 박물관에서 먹은 폴라포 아이스크림의 포도맛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쓸데없는 얘기지만 나는 우유맛이 가미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데 그날은 너무 더워서 우유맛 대신 과일맛의 상큼한 아이스크림을 선택했고, 남편이 신기해하는 소소한 추억이 부가되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것 같다.
그런데 과일맛이면 아이스크림 대신 빙과라는 표현을 써야 되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금방 포도주스의 형태가 되어있었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차 안에서 녹아내리는 나를 데리고 남편이 도착한 곳은 부여왕릉원이었다.
이곳 또한 정림사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나마 산이 있고 흙바닥 대신 잔디가 고르게 자라 있어서 그럭저럭 걸을 수는 있었다.
게다가 더운 날씨 탓에 인적도 드물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기가 빨리는 우리 부부로서는 오히려 좋아~
처음 듣는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와 마냥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 기분도 오래가지는 못 했다.
풀이 많은 곳이면 응당 따라오는 벌레 때문이었다.
어릴 적이야 무서운 게 많았지만 크면서 귀신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고, 높은 곳은 안 가면 되는 거고(고소공포증이 있다)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재미없고 기운 없는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벌레는 여전히 무서웠다.
특히 날아다니고 다리가 많고 검은색이면 가장 피로한 목요일에도 탭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무서워하는데, 하필 그런 류의 벌레들이 왕릉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들을 보면 나한상의 표정과 흡사한 표정을 하고 있다.
큰 것을 깨닫기는 했다. 노후에는 산이 있고, 풀이 많은 시골에 가서 살리라는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된다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