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입니다 취향해주세요.
우리 부부에게서 커피 말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술이다.
현대인의 필수 영양소 세 가지로 꼽히는(?) 카페인, 알코올, 니코틴 중 두 가지를 꾸준히 섭취하고 있는데 니코틴이라도 안 해서 다행이다 라며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켜 본다.
사실 신혼 초의 나는 술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그 분위기를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살짝 흐트러지는 의식으로부터 오는 여유로움이 좋았고, 진솔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주는 연대감이 좋았다.
반면 남편은 오롯이 취미생활을 즐기며 곁들이는 혼술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결혼하고부터는 둘이서 마시는 것도 즐겁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뀐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우리의 연애기간 동안 장롱면허인 나를 대신해 온전히 운전을 담당해야 하다 보니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가서야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결혼하고부터는 운전이나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곁들인 술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버렸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신혼 초 우리의 주종목(?)은 맥주였는데 남편은 목 넘김 때문에 맥주를 선호하는 편이었고,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도수가 낮은 맥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맥주에 약한 편이었다.
맥주는 한 캔만 마셔도 알딸딸해지는 반면 소주는 이상하게 한 병을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듯했다.
찾아보니 맥주나 와인에 들어있는 아세트알데히드라는 성분 때문이라는데 와인은 또 괜찮은 걸 보니 그냥 내가 맥주는 안주 없이 벌컥벌컥 마시는 습관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 무렵의 우리는 영혼의 음주메이트가 생겼다는 기쁨에 매일 밤마다 소소한 술파티를 즐겼고, 그 결과 나와 남편은 막중한 살과 밤이면 자꾸 술이 떠오르는 중독을 얻게 되었다.
위기감이 생기긴 했지만 멈출 수 없던 우리 부부는 이직 준비기간이 겹치며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반 강제적으로 제동이 걸리게 되었는데, 일주일에 많으면 두 번이라는 암묵적 룰은 아직까지는 비교적 잘 지켜져오고 있다.
(물론 연말 연초 연휴 여행기간에는 유연성 있게 봐주기도 한다 ㅎ)
그러던 중 긴 시간 꾸준히 지켜져 왔던 우리의 음주 취향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남편 친구 부부의 집에 놀러 가면서부터였다.
사는 지역의 거리가 멀다 보니 자주 왕래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1년에 한두 번은 꾸준히 보던 사이였는데, 그 지역에 방문할 일이 생겨 겸사겸사 집에도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사실 내가 집순이다 보니 집에 누가 오는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타인의 집에 방문할 때도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술의 장점이 뭐다? 긴장감을 완화시켜 준다! 단점이 뭐다? 긴장감을 완화시켜 버린다!
처음은 분명 가볍게 맥주와 소주로 시작했는데 끝에 가서는 위스키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사실 위스키를 아예 처음 마시는 건 아니었다. 하이볼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하이볼로 자주 접하기도 했고, 친구들끼리 놀러 갔을 때 큰맘 먹고 공금으로 산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잭다니엘스를 마셔본 뒤 안주 없이도 먹을 수 있는 점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친구들과 내가 마신 그날의 위스키는 단맛이 나는 소주 대용품 정도였던 것 같다.
매번 마실 때마다 겨우 한 병에 3~5만 원을 태울 수는 없지 라는 생각에 그 뒤로 위스키는 하이볼로만 접하고 있었는데 마시는 방법이 잘못됐었던 것이다.
우리가 소주잔에 벌컥벌컥 마셨던 그 위스키는 사실 한 모금씩 향과 풍미를 즐기며 마시는 방법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인심 좋은 내외분이 한잔씩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를 내어주시는 동안 나는 이 비싼 술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맛보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뒤 다음날 지독한 술병을 얻었다.
나와달리 남편은 아주 멀쩡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가끔씩 위스키를 마신 경험이 있어서 나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를 지키며 마셨던 모양이었다.
술이 올라 신이 난 나머지 뉴비의 면모를 모두 드러낸 건 부끄러웠지만 맛있는 술을 여러 가지 알게 된 것은 매우 기뻤다.
그리고 가성비를 매우 따지는 나에게 한잔만 마시면서 두고두고 킵해놓고 마실 수 있는 술 이라니, 이 얼마나 매혹적이란 말인가..
드라이하고 가벼운 화이트와인을 굉장히 좋아했었지만 와인은 개봉일로부터 빠른 시일 내로 모두 마셔야 된다는 점 때문에 자주 마시지 못했는데, 위스키는 오히려 에어링 되면서 맛이 바뀌어 한 병으로 여러 맛을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우리 부부에게는 술 진열장이 생겼고, 각자의 위스키 취향을 알았고, 나는 여전히 소주를 즐겨마신다..
결론이 어처구니없지만 평생을 가성비를 따지며 살아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밥에 곁들이는 술을 즐겨마시는 내 반주취향과도 위스키가 안 맞기는 하다.
남편은 주말마다 한잔씩 니트나 언더락으로 마시지만 나는 기분이 좋을 때만 니트로 마시고는 하는데,
남편은 코냑 버번 블렌디드 가리지 않고 잘 마시는 편으로 안주는 주로 가벼운 육포류를 선호하는 반면 나는 피트향이 강한 싱글몰트를 좋아하는데 식사류와 궁합도 잘 안 맞을 뿐 아니라 페어링 되는 안주들이(초콜릿이나 단 과일류?ㅎ) 전혀 내 취향의 안주가 아니었다.
내가 선호하는 안주류는 주로 오돌뼈, 돼지껍데기, 된장술밥, 똥집 같은 소주와 아주 찰떡인 메뉴들인데 이게 또 웃긴다.
남편과 둘이 호프집에 가면 각자 주문하고는 하는데 나는 소주 한 병과 앞에서 얘기한 류의 안주들을, 남편은 생맥 한잔과 소시지 또는 과일류를 주문하면 백이면 백 반대로 서빙이 되고는 한다.
하이네켄 광고 중에 맥주를 주문한 여성에게는 칵테일을, 칵테일을 주문한 남성에게는 맥주를 서빙해 주는 성 고정관념을 꼬집은 내용이 있었는데 마침 부모님과 식사할 때 그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우리도 저런 일이 자주 있었다며 가볍게 드린 얘기에 아빠가 편협한 사고들을 깨기 위해 열심히 한다고 좋게 해석해 주시는 바람에 술 취향이 갑작스레 비장하게 둔갑되어 버린 기억이 난다.
단순히 비주류 병이 있는 것뿐이라 이러는지, 비주류 취향만 타고나서 이러는지, 아니면 아빠의 해석처럼 고정관념들을 깨부수려 청개구리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이건 아닌 게 확실하다) 각자의 취향이 비장하지 않을 수 있게, 그냥 좋아하는 것뿐인 것이 다양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