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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레몬 Jun 12. 2024

주류 속의 비주류, 딩크로 살기 004

돌고 돌아 핸드드립

우리 부부는 마시는 음료 취향도 참 비슷한데, 그중 하나가 블랙커피였다.

둘 다 단맛을 선호하지 않다 보니 깔끔하고 향이 좋은 커피를 선호하는데, 신혼 초에는 남편이 즐겨 쓰던 드립 커피 메이커를 가져와서 자주 내려 마시고는 했다.

엄마가 안 쓴다며 물려주신 드리퍼와 핸드밀, 드립포트로 구성된 핸드드립 세트도 있었지만 커피 내릴 시간에 같이 게임도 해야 되고, 볼 영화도 많다는 이유로 선반 구석에 봉인되었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집 바로 뒤에 단골카페가 생기면서 드립 커피 메이커도 같이 선반 구석에 봉인한 뒤 매일매일 카페로 출석체크를 했다.

퇴근길 루틴에 단골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사서 집에 가기가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는데, 주말에는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 우리는 미리 금요일에 단골카페표 더치 원액을 사 와서 물에 희석시켜 마시고는 했다.

편리성과 효율성으로 제법 긴 시간을 지내던 우리의 단조로운 커피 인생에 강제로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코로나였는데, 사실 우리 부부는 코로나의 영향을 그나마 덜 받은 편이기는 하다.

워낙 집순이 집돌이들이라 일상생활에 마스크가 추가되고, 친구들과의 약속 빈도가 줄은 것 정도를 제외하면 평소와 다름없는 듯했는데 단골카페가 코로나로 인해 단축영업을 시작하고 디저트로 주력메뉴를 바꾸신 탓에 우리는 갈 곳 잃은 카페인 중독자들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사서 마셔보고, 인터넷으로 더치 원액을 사서 마셔 봤는데도 도무지 크레마가 둥둥 떠있는 아메리카노의 진한 맛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단톡방에 한 친구가 캡슐머신을 새로 샀다며 커피사진을 올렸는데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크레마가 풍성하게 떠 있는 게 아닌가!

재빠르게 모방소비로 캡슐머신을 사 온 우리 부부는 한동안 줄기차게 캡슐커피를 내려 마셨는데, 주말에도 크레마가 동동 떠있는 아메리카노를 금방 내려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줬었다.


그러던 중 우리와는 다르게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던 또 다른 친구가 더 비싼 머신을 사게 되었는데 혹시 기존 기기를 가져갈 의사가 없냐고 물어왔다.

가성비를 굉장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공짜로 기기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기기만 받아오기가 미안해서 가격이 좀 있는 게이샤 원두를 사다 주었는데, 친구가 기뻐하며 새로 산 머신으로 뽑아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커피맛을 구분하기보다는 그냥 고소한 맛을 좋아해 다크로스팅의 커피를 선호했었는데, 산미가 있는 원두의 매력을 그날 처음 알았고 오늘까지도 줄기차게 마시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기쁜 마음으로 가져온 에스프레소 머신은 사용법이 생각보다 굉장히 귀찮았다.

원두를 그라인더에 소량 넣고 분쇄한 뒤, 갈린 원두를 포타필터에 넣고, 템퍼로 꾹꾹 눌러 템핑 하고, 에스프레소를 내린 뒤 남은 원두찌꺼기를 넛박스에 통통통 쳐서 버리고, 추출구를 잘 닦아주고, 포타필터도 깨끗하게 세척해 주고..

귀찮은 만큼 뿌듯하기도 했지만, 가정용 머신이다 보니 단골카페의 맛은 아무래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캡슐머신 또한 단골카페의 커피맛을 따라갈 순 없었지만 캡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끝이다 보니 편리성으로는 압도적 승리였다.


하지만 그 캡슐머신의 사용도 주저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환경문제 때문에 재활용이 가능한 알루미늄 캡슐을 계속 사 마셔왔는데, 그 알루미늄이 누적되면 치매위험이 있다는 글을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걱정이 되어 조금 더 찾아보니 캡슐로 내린 커피의 알루미늄 함량은 건강상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다른 게 문제였다.

내가 사랑하는 크레마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여 고지혈증의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냥 눈감고 마시자니 이미 고지혈증에 안 좋다는 술까지 사랑하는 애주가로서 무언가 하나는 포기를 해야만 했다.

(사실 한 달 정도를 커피와 술 둘 다 끊었는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삶을 연명해야 하는 걸까 하는 극심한 무료함이 느껴져 적당히 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게 되었는데 바로 남편과의 데이트 중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개인카페에서였다.

그 작은 카페는 핸드드립 전문 카페였는데, 원두를 선택하면 멋진 노신사 바리스타가 천천히 커피를 내려주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핸드드립 커피의 향긋함과 콜레스테롤 걱정이 없는 점,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남편은 바리스타분의 모습에서 뭔가 낭만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귀가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혀있던 핸드드립 세트를 발굴해 냈고, 내가 책을 읽는 동안 남편이 뚝딱 커피를 내려왔다.

그 카페에서 마신 커피만큼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향기롭고 맛있었는데, 특히 집에서 금방 갈린 원두의 향을 맡을 수 있는 점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여기서 행복하게 마무리하면 좋았겠지만, 회사에서 스몰토크로 이 얘기를 하며 건강에 나쁘지 않은 핸드드립 커피를 추천했더니 과장님이 파란 레몬씨는 애가 없으니까 스스로 건강 챙겨야지라는 식의 말을 꺼냈다.

그럼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 안 챙기나? 우리 부모님은 스스로 건강 챙기시는데..

아이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얘기를 내가 딩크족이라는 이유로 어느 얘기건 갖다 붙이는 것에는 이미 적응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커피에 관련된 얘기 중에도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해서 조금 충격이 있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다양하게 더 많이 있을 테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뒤끝이 있는 나는 이렇게 과장님이 못 보는 곳에 기록해 둔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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