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간의 여유로움, 그리고 3일간의 고통 (2)
6일 차 아침, 우리 가족은 어김없이 윤서 누나네와 조식을 먹고 있었다. 평상시였으면 서로 좋은 아침이라며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오늘 하루는 어떨까 기분 좋은 이야기들을 했을 텐데, 이날의 분위기는 유독 달랐다.
누나와 나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시차를 감안했을 때 한국의 시각은 오후 1시쯤. 방학인 한국 친구들이 오후 1시부터 나를 그렇게 찾을 일은 크게 없었다.
무슨 일일까, 아침부터 잘 터지지 않는 와이파이로 상황을 알아봤다. 지진이 났단다.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여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지진이? ‘금방 괜찮아지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이 상황을 애써 부정하려 했다. 내가 있는 곳에만 지진이 나지 말게 해 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와 함께 말이다.
당시 튀르키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30명 이내였다. 지금 돌아보면 참 적게만 느껴지는 이 숫자가 튀르키예에 여행하고 있는 나에게는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가이드 아저씨도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인 점은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우리가 현재 있는 지역까지는 약 700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현재 몸담아두고 있는 나라에 너무 큰 재난이 일어난 건 처음이라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앞으로 튀르키예 땅에서 이러한 재난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번의 해외여행과 유학 생활, 그리고 스무 살 이후엔 제주도에서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비행기를 탈 기회가 많았다. 난 유독 비행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지연 출발은 많았어도 결항은 단 한 번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2022년 겨울 제주에서 김포로 가는 비행기에서 첫 결항을 겪어봤다. 아주 최근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폭설로 인한 도로통제 이후로 여러 사건들이 터졌다. 7일 차 오후엔 아드난 멘드레스 공항에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는 비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국내선 항공임에도 우리는 2시간 전부터 공항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느새 오후 3시 반, 슬슬 탑승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게이트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광판을 다시 살펴보니, 1시간 20분 딜레이가 됐다고 했다. ’이스탄불도 눈이 내리고 있나 보다, 조금 뒤면 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더 기다리기로 했다.
1차 지연을 하고 약속한 오후 5시가 찾아왔다. 이번엔 게이트 앞에서 기내식을 나눠주는 게 아닌가. 기내식이랄 것도 없지만 항공사 직원분들은 우리에게 샌드위치 하나와 탄산음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아 또 딜레이겠구나…’싶은 생각에 전광판을 바라보니 이번엔 오후 7시 15분 출발로 또 미뤄져 있었다. 총 3시간 20분 지연.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국내선 위주 공항에 2시간씩이나 일찍 도착했으니 총 대기시간은 5시간을 넘긴 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2차 지연 후 대망의 오후 7시. 이젠 우리의 시선은 모두 전광판으로 향해있다. 슬슬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니 이번에도 전광판에 우리 비행기 편 시간이 사라졌다. 이번엔 얼마나 미룰까, 이젠 더 이상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경우의 수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CANCELLED. 이제 와서 결항이라고 한다. 왜 이제야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전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겠나, 이곳은 튀르키예다.
결국 오후 8시 반쯤, 우리는 공항에서 다시 나와 이스탄불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에 이스켄데르 케밥도 먹었다. <스트리트 푸트 파이터>에서 백종원 씨가 그렇게 극찬을 한 음식인데, 기분 탓이었는지 별로 맛있지도 않았다. 빨리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패키지여행을 한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포함해 총 10팀가량 있었다. 그중 내 또래의 대학생들은 6명이 있었다. 5시간의 대기시간을 못 참았는지 우리는 한두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sns계정을 서로 공유하고 팔로우를 걸었으며, 뻔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어느 대학 어디 과에 다니고, 튀르키예 여행은 어떻고 등등. 어색한 대화였지만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덕분에 남은 이틀간의 여행은 우리끼리 붙어 다니면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이 모임을 ‘터키즈’라고 부르기로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승주 누나와 민정이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사이라 현재까지도 꾸준히 만나며 지내고 있고, 나는 윤서누나와 서로 집이 멀지 않기에 시간이 날 때 틈틈이 만나고 있다. 여행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행기 결항을 한 대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아직까지도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이득인 것 같다. 그래도 다음 여행 땐 결항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