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속 가능한 내일

진정한 풍요를 위한 절대 조건

by 할리데이

10여 년 전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중해 어느 섬에서의 오후. 포구 한편에 놓인 안락의자에, 한 손에 포도주병을 쥔 중년의 남자가 술에 취한 채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이를 보고 넌지시 물었다.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각에 왜 일을 하지 않고 있냐고.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되물었다. 오전 일을 끝냈는데 왜 이 시각까지 일을 해야 하냐고. 그러자 관광객은, 오후에도 일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냐며 충고하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이오.” 중년의 남자가 반쯤 정색하며 말을 되받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뭘 어쩐다는 거요?” “당신의 안락한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관광객이 답했다. 그렇게 벌고 모은 돈으로, 다가올 미래의 어느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곳에서 화사한 햇볕을 받으며 술도 한잔 곁들일 수 있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보시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년의 남자가 쏘아 붙였다. “바로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지 않소?”


<레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 폴 세잔, 1885년경

이 이야기는 실화 여부를 떠나 당시 유행하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이다. 즉 한 번뿐인 인생, 지금 실컷 즐기라는 뜻) 열풍을 타고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다가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실의 상황을 즐기자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 주면서다. 현실에 만족할 줄 알고 현실에서 행복을 구하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재미있으면서도 나름 메시지가 있는 에피소드였다.

어쩌면 그날, 관광객은 욜로의 열혈 실천가이던 중년 남자의 말에 조금은 머쓱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섬사람의 말은 틀렸고, 관광객의 말이 옳았다. 섬 남자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로 잠깐 가보자

동태평양의 칠레령 이스터섬은 한때 초록이 무성한, 그리고 모아이라는 거석문화가 꽃핀 아름다운 섬이었다.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모여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땔감으로 쓰기 위해, 배를 만들기 위해, 모아이 거석상을 옮기는 받침목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섬사람들은 초록 무성한 숲과 먹을거리 가득한 바다가 주는 풍요에 취해 섬의 자원을 낭비하고 또 낭비했던 것이다. 결국 섬은, 풍요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섬사람들은 섬에서도 먹을 걸 구하지 못했고, 타고 나갈 배를 만들지 못해 바다로부터도 먹을 걸 구할 수 없었다. 부족 간 전쟁이 일어나고 식인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인구는 1/3로 줄어들었다. 초록 무성하던 그 숲이 바닥을 드러내리라 상상조차 하지 않던 이스터섬 사람들은 그렇게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갔다.

사실에 기반한 이 이야기는, 눈앞의 풍요에만 매몰돼 있던 사회가 어떻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


앞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욜로의 화신이던 지중해 섬 남자는 분명 하루하루를 멋지게 보내고 있었다. 현실에서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말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불만만을 일삼으며, 좌절과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삶의 여유와 안락을 현실 속에서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아쉽게도 중년 남자에게는 그 여유와 안락이 단지 오늘까지만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행복을 내일까지 담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내일 폭풍우가 불어 닥친다면?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도 없고, 그래서 포도주 한 병 살 여유도 가질 수 없게 된다면? 엄밀하게 말하자면, 섬의 중년 남자는 내일의 안온한 일상과 행복한 노후를 준비하지 않는 하루짜리 삶만을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더 큰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이야기의 범위가 개인을 넘어 사회로까지 확장되어서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의 풍요만을 탐닉하는 사회는 결국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원을 낭비하던 이스터섬 사회는, 번영의 지속은커녕 때 이른 종말을 맞이했을 뿐이다.


부(富)를 소비할 때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느낀다. 에너지 자원을 활용한 각종 도구를 사용하면서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편리함을 만끽한다. 자원(넓은 의미의 사회의 총체적 자원을 의미한다. 에너지 자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처럼 달콤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달콤함 뒤에 드리워진 쓴 그림자를 직시해야 한다. 절제와 계획이 수반되지 않은 자원의 남용은 미래를 갉아 먹을 뿐이기 때문이다. 무절제한 부의 낭비로 발전 도상에 있던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빈곤 사회로 되돌아간 것, 에너지 자원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지구촌의 환경이 피폐해지고 있는 것 등은 지금도 진행 중인 사실(fact)이자 사례다.

대책없는 부의 소비와 분배를 가장한 무분별한 부의 낭비는 빈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자행하고 있는 환경 파괴는 지구촌 사회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대재앙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자행하고 있는 무분별한 자원 남용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였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풍요로움이란 단순히 어제보다 나아진, 그래서 언뜻 풍요로워 보이는 오늘을 의미하진 않는다. 항구적이며 지속 가능한,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그러한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옛사람들도 항산항심(恒産恒心, 안정적인 생산 수단이 있어야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이라는 말로 ‘지속 가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속 가능한 생산 수단과 사회 운영 시스템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풍요와 번영을 보장한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일찍이 강조한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불편을 감수하는 절제와 철저한 계획. 그래서 지속이 보장되는 내일. 진정한 풍요의 절대 조건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빅뱅에서 인류까지 32 달 이야기 / 달의 초상 ③-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