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우리 집
최근 주민등록초본을 발급 받을 일이 있어 떼어 봤더니, 나의 일곱 번째 우리 집이 딱 나왔다. 나의 일곱 번째 우리 집은 주민등록초본 상 첫 번째 우리 집 다음에 나온 집이니 그동안과는 나름 다른 요소들이 많았다고 해야겠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 집을 돌아다녔어도 나의 행적은 관에서 말하는 공식적인 우리 집이 아니었던 것(나의 공식적인 우리 집은 시골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일곱 번째 우리 집은 처음으로 나를 세대주로 한 집이었고, 처음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집을 계약하고 확정일자도 받은 집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아버지가 보내준 천 만원을 보증금으로 삼고 월세를 내는 형태로 서울에서 가장 싼 곳을 찾아 집을 얻었다(그 당시 천 만원이라는 돈이 내게 얼마나 컸던지 은행에서 뽑아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천 만원짜리 수표를 들고 가서 보증금을 지급할 때는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 중랑구의 한 다세대 주택가에 여동생과 같이 살 방 두 개짜리 쪽방을 얻게 된 것이다.
나의 여동생은 나와 3살 터울인데 나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경우라 하겠다. 없는 시골 살림에 공부 좀 해보겠다고 무리해서 도시로 도시로 나와 대학까지 가는 동안, 여동생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었다. 아버지는, 오빠가 대학가는데 너는 안 된다며 실업계 고등학교를 보냈고, 대학은 당연히 포기. 이 과정에서 동생은 단식투쟁까지 하며 버텨보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한다. 내가 정신없던 고등학생이 아니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인문계를 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많이 가졌던 대목이다.
그런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근교에 직장을 구해 올라왔는데 나의 처지가 그러하니 친척집에 잠시 기거했다가 결국 나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나름 큰 마음을 먹고 비용을 마련하여 자식 둘을 친척집이 아닌 곳으로 독립시킨 셈.
한편, 나는 결국 아버지가 마련한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여동생이 마련한 돈으로 월세를 내며, 또다시 얹혀사는 것과 진배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곱 번째 우리 집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의 삶이었고 세상에 대한 참으로 많은 몸부림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사를 한 것이 10월 말이었으니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붕대를 풀 무렵이었을 것 같다(실제로 산행을 재개한 것이 이듬해 봄이었으니 상처가 완쾌되지 않은 상태로 이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이사를 왔고 동생도 나도 우리만의 공간이 생긴 것을 감격해 하며, 동생은 여기저기 청소하고 닦고 치우고 있었고 나는 맥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내 방에는 책상과 책꽂이를 두었고 바로 옆에는 간이 부엌이 있어 ‘블루스타’를 두고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생방이 있었고 어디선가 구한 중고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씻고 샤워를 할 수 있는 작은 세면장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외부에 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순서대로 쭉 나열되어 있는 일렬식 구조였다. 옆집 혹은 윗집의 얘기가 다 들렸는데 우리는 우리 얘기가 들릴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어쨌든 나는 남은 대학생활을 여기서 보내게 되었다. 가까이에 시장이 있었고 참으로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빈 공간이 남아나질 않아 보였다. 전형적인 구형 콘크리트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참으로 시골 풍경을 그립게 만드는 동네였다.
겨울을 지나 다음 해가 되어서야 나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1년이 넘도록 제대로 운동을 못하다가 봄이 되면서 부터 운동장을 뛰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친 발가락은 다 아물었지만 흉하게 뭉게져 보였고 손가락은 부분부분 잘리고 꼴사납게 찌그러져 아물어 있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었고 운동까지 하게 되었으니 너무너무 행복했다.
나는 히말라야의 차가운 추위에서도 그 어려웠던 형들과의 관계에서도 해방된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지긋지긋한 병원생활도 붕대살이도 졸업을 했다. 몸도 젊어서인지 금방 회복되었고 체력도 전성기 못지 않게 좋아졌다. 해방감과 함께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까지 느끼게 되었다.
봄학기가 열리면서 미친듯이 운동하고 산에 다녔다. 필수적인 전공 공부도 대충 마무리하고 자유롭게 비 이공대 과목들을 두루두루 듣기도 했으며 산악부 생활도 안정적으로 즐기게 되었다.
몸도 가볍고 갈 수 있는 산도 많기에 신나고 또 신났다. 내가 앞으로 어떠한 직업을 갖더라도 나는 산과 함께 하리라. 내가 어떠한 삶을 살더라도 산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새삼 단단히 하던 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형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편안해졌다.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의 좋은 날은 언젠가는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더욱 산을 즐기기 위해 애를 썼고
행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그 해 여름 방학에 한 선배의 돈을 빌려 일본의 산에 갈 때도 마지막이겠거니 생각했었다. 나는 이제 나의 진로를 정해야 했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직장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의 지나온 인생을 돌아봐야 했다. 나의 앞날을 고민하다 빠져든 게 산이었고 그건 일종의 도피였다. 나름 멋진 대학생활 혹은 나름 젊음을 맘껏 발산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 나의 기본적인 의무를 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밥벌이 말이다.
직업? 직장? 나에겐 그저 밥벌이였다. 미래? 꿈? 이런 건 오로지 산에서만 있었다. 그건 내가 마음먹고 대학원에 가보겠다고 결심하고 시도를 할 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등록금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교수님을 찾아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교수님은 구리에 있는 연구실을 내어 주시며 대학원생인 동기와 함께 연구과제를 주셨다. 여름방학 동안 같이 배우며 연구를 했는데, 최악이었다. 너무 힘들고 너무 쉽게 체력이 소진되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미생물 실험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비이커나 시험관은 내 손을 쉽사리 빠져나가 부서지기가 일쑤였다. 나는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포기하기로 했다. 내게 맞는 산을 경험해서인지, 내가 설레지도 않고 할수록 힘이 생기는 일이 아닌 것은 나의 길이 아니란 걸 알았다. 교수님 뵙기가 너무 죄송했지만 포기했다. 나의 학업은 여기서 끝내야 했다. 아버지는 뭐한 거고, 여동생은 뭔 고생을 또 한 건가.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취업으로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 아니 그냥 ‘돈 벌기’로 정했다. 내가 공부를 포기한 건 정말 너무 허무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안 맞았다. 닥치는 대로 일하고 돈을 벌기로 했다.
부족하지만 남들처럼 원서라는 것를 내봤다. 떨어졌다. 전공과 관련 있는 회사였는데 서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어차피 적성도 안 맞는 일.
시무룩해져 교정을 방황하다 암벽등반하는 사진을 내세운 취업광고를 봤다. 이번엔 언젠가 우연히 시험을 본 - 형편 없는 점수의 - 토플점수까지 넣고 산악부 지도교수의 추천서도 받아봤다. 당연히 떨어졌다. 열받았다. 교수님한테 무안까지 당하면서 어렵게 제출한 서류였는데… 더욱이 암벽등반하던 내가 이제 갈 데가 어디란 말인가. 나를 떨어뜨린 회사가 어딘가 봤더니 보험회사였다.
홧김에 혹은 걸린 돌부리인양, ‘보험’자가 들어간 회사를 공략하기로 했다. 난 단순히 일을 해결하기로 했다. 취업정보과에 갔다. ‘보험’자 들어간 걸 발견했다. 지원했다. 전화하고 면접보러 갔다. 면접을 봤다. 그 자리에서 합격. 난 취업이 된 것이다. 교수님들께는 취업되어 출근해야 하니 수업을 마저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의심하는 교수님도 계셨다. 나는 적당한 학점으로 마무리 하기로 하고 회사를 다녔다. 동생이 해줬나? 비싼 양복도 해 입었다. 한달을 다녔는데 보험료로 다 나가야 한다며 월급을 안 줬다. 밥만 얻어먹었다. 그러고 보니 직장 동료도 마땅히 없었다. 사장하고 밥먹기를 몇 주. 난 뭔가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생이 망쳐진 걸 알고 멍하니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다보니 조금있다 IMF금융위기가 터졌다. 나라 분위기가 흉흉했다. 나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상태. 난 앞으로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보험설계사 밑의 사용인으로 입사를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팜플렛하고 책자 몇 개 보고 보험을 팔러 가야했다. 나는 핑계김에 산악부 선배들의 회사를 돌아다녔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갈 때마다 나는 부끄럽고 창피했다. 형들은 나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주지 않았다. 말하기가 미안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안면 몰수하고 그냥 인사겸 정찰겸 여러 형들을 찾아다녔다. 다들 열심히 잘 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너무 초라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시끄러운 김종국의 노래가 들리던 주유소 건물의 2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사장의 지시에 따라 거기서 가까운 중학교에 보험 팔러 갔는데 정문 5미터 전방에서 나는 한 발짝도 못 떼었다. 이젠 무서웠다. 사회가 무서웠다. 세상이 무서웠다. 내가 그동안 산에 간 건 뭐란 말인가. 아무리 큰 산에 가서 경험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했다해서 사회의 어려움이 우스운 건 절대 아니다.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에베레스트에 가기 전으로, 아니 산악부에 들어가기 전으로, 아니 대학 입학식 날로, 아니 그보다 그 많은 실수를 했던 학력고사 당일로, 아니 그 무엇보다 당황하고 조급했던 고등학교 생활의 초창기로, 아니 아예 고등학교 선택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끝났다. 다 망쳤다.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취업을 의심하던 교수님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조롱을 할 것인가.
더이상의 바닥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일어서기까지는 주변의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다행히 나는 사장이 던져 준 책의 끝무렵에서 손해사정인과 보험계리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물어보니 잘 모르는지 숨기는 건지 얘길 안 한다. 난 뭐라도 건져야 햤다. 나는 퇴근 후 서점에 가서 미친 놈처럼 그 내용을 찾아 봤다. 그냥 뭔가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수험서 섹션에서 그와 관련 책자를 찾았다. 책자는 한 학원에서 만든 것이었고, 나는 학원이름과 위치를 메모하고 주말에 바로 그 학원에 갔다.
나는 뭔가 무지하게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그 학원에서 손해사정인은 1,2,3종이 있고 마침 1,2종까지 이번에 개강을 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걸 확인했다. 그럼 좀더 새로운 걸 하고 싶었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게 어디냐. 곰곰히 생각하며 집으로 후퇴. 오면서 해상보험을 공부가기로 결심했다. 2종. 동생한테 학원비 60만원을 빌리기로 했다. 정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했을 것이다. 아마도 간절하게도 말했을 것이다. 내가 술 퍼먹느라 달라는 건 아닌지라 동생은 선뜻 마련해줬다. 다음 주말에 등록하고 첫 수업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연 수업이란다. 재미있었다. 이걸 하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출근하면서 회사(?)를 관두기로 했다. 회사를 관둘 명분이 필요했다. 이미 큰 실패감을 맛 본지라 더이상 미련이 없었다. 그 일은 더 능력있는 분에게 맡기기로.
그렇게 그렇게 나의 목표를 설정한 뒤 어쨌든 졸업이라는 것을 했다. 대학 참 징글징글하게 대충 또는 처절하게 다녔다. 나는 과연 그 등록금 값을 하기는 한 건가. 머리도 제대로 다듬지도 않고 표정도 엉망이 되어 대충대충 아버지와 여동생이 참여한 졸업식을 마무리 했다. 동시에 나는 공식적인 백수가 되었다.
(악필, 20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