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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Feb 13.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9


백수가 된다는 것이 뜻밖에 그렇게도 죽을 거 같은 일은 아니었다. 백수에 대한 공포감으로 어떻게든 소속된 위치를 잡고자 무리수를 두고 불안에 떨며 안달복달하던 걸 생각하면 괜한 짓을 한 거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핑곗김에 형들을 찾아다닐 때 어떤 형님 한 분이 그랬다.


“그냥 놀아! 그냥 기다려!!”


잘 나가는 증권맨이던 형은 괜히 뭘 무리해서 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조급하게 취업을 하려고 했고 무작정 나가 사회에 부딪혀 적응하려고 했다. 물론 이 또한 저질렀기에 얻은 결과라 헛수고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이제 나는 뭔가를 준비해야 할 때인 건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다. 동네 목욕탕에서 온도계가 없다면 그리고 옆에서 충고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이라도 욕탕물에 넣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엄한 짓을 한 나의 핑계였고 명분이었다. 이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며 터득(?)해온 일종의 행동패턴 혹은 노하우 같은 것이라고 봐야겠다. 일단 해봐야 뭐라도 알 것 아닌가. 비교적 좋은 결과를 얻은 바 있다.

어쨌거나 나는 세상에 대한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게 되었고, 그래도 뭐라도 준비할 거리는 만들어 놓고 졸업한 상황은 되었다. 그동안 취업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 나름 한 발짝 진보는 한 셈이다. 다행이었다.


또 한편, 내가 졸업할 당시는 IMF 금융위기가 시작된 직후여서 나라는 온통 시끄럽고 절망적이었으며 우울했다. ‘위기가 기회다’라는 말이 이럴 때 써먹어도 되나 모르겠으나, 나는 어차피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가 없어 백수가 되었는데, 준비된 그 누구도 취업을 쉽게 할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심지어 금융위기 직전에 든든한 회사에 취업을 했던 사람들도 취업이 취소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나라가 온통 엉망이 되었으니 그 가운데 백수생 한 명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얼굴을 붉히지 않으면서도 백수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여간 나는 이 기회,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 소중한 시기를 밥벌이 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렇다고 백수라는 우울한 무게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막막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압박감은 어둡고 캄캄한 굴속을 막연히 파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으니 희망의 가느다란 끈은 쥐고 있었는데 그 또한 어디 내세울 만한 단단한 끈이 아니어서, 나 혼자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무척이나 외롭기도 했다. 내가 준비하는 자격증은 취득을 한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다 내세워서 뭘 한다고 얘기하기가 민망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 도서관에서는 회계사다, 행정고시다, 사법고시다, 기술고시다, 하며 멋지고 난이도도 있는, 그리고 미래가 보장된 일에 도전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누구랑도 고충을 털어놓거나 나눌 수 없었기에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다. 하는 공부는 재미있었는데 문득문득 느끼는 불안감을 믹스커피에 진하게 담배를 빨아 피며 달래야 했다.


나는 사실 군 면제를 받은 상태여서 다른 동기들에 비해 2년은 여유가 있었다. 막연히 휴학상태로 두기도 싫었고 장학금도 계속 받아야 했기에 일찍 졸업을 하다 보니 정말 금쪽같은 20대의 2년이 남아 있었다. 회계사든 변리사든 또 다른 고시든 도전해 볼만했다. 그동안 하도 공부를 안 해서인지 공부에 대한 열의는 넘쳐났고, 당시 난 체력 좋은 20대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저것 생각을 해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도전 대상을 위한 책을 살 돈도, 학원에 등록할 돈도, 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기본 생계용 돈도 없었다. 더 이상 뭔가를 하기 위해 아버지 혹은 여동생에 돈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고시가 되면 확실하겠지만 안 될 경우 그에 대한 타격은 회복이 불가했다. 젊은 나이에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고? 나는 산에서 도전이라는 것도 감당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어야 위험을 감수하며 해 볼 수 있다는 반복적으로 배웠다. 자일도 없이 바위를 타는 것과 같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작은 성공이 필요했다. 취업을 위한 작은 성공. 나는 당장 입금되는 안정적인 돈이 필요했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골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도. 그러니 나는 취업을 위한 작은 일부터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는 게 그 단계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 나는 돈 대신 2년의 시간이 있었고 그 소중한 자산을 작은 성공을 위해 쓰기로 했다. 과목도 많지 않으니 책값도 학원비도 부담이 덜했다.

다만 남들이 모르는 매우 좁은 분야의 자격증이다 보니 불안한 마음이 수시로 밀려왔고 학교 내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외로웠다.


머리 한쪽에 나는 백수다, 나의 미래는 불안하다,는 생각이 가시처럼 박힌 상태에서 6개월을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폼나는 자격증은 아니더라도 이왕 귀한 시간 소모해서 하는 거 '갈아 마실' 정도로 확실하게 하고자 했다.

그 사이 산악부실에 가서 동기와 선후배들도 보고 간혹 산행에도 참석했지만 나는 작은 성공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을 치렀고, 운 좋게 1차 합격, 부랴부랴 2차도 마저 공부해 시험까지 치렀다. 그게 8월 말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모든 게 다 나의 일곱 번째 우리 집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시험을 마친 나는 이제 정말 아무 할 일 없는 백수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후배들을 데리고 북한산에 암벽을 타러 갔었다. 이 또한 백수라는 인식에 대한 괴로움을 덜기 위한 위장전략이었지만 나의 자존감을 확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산행 후, 학교 앞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선배 한 분이 간곡히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통화를 했더니 불쑥 금강산 가이드를 신청해 보라고 하셨다. 나보다 20년이 훌쩍 넘는 형님이었지만 내가 백수라는 사실이 온 동네에 소문이 났는지, 금강산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내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남북관계는 빠른 속도로 개선되어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소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금강산 관광을 위한 유람선 얘기를 들었고, 산을 좋아하고 선박보험을 공부하는 내가 가면 참 좋겠다고 상상의 나래를 폈었는데, 그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침 시험도 끝난 마당이라 미리 짠 거마냥 딱딱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그냥 백수가 아니라 또다시 뭔가를 준비하는 백수로 바뀌었다.


부랴부랴 이력서를 써서 제출했는데(이때 내가 그 비싼 졸업앨범의 사진을 오려 붙이지 않았나 한다. 현재 나의 앨범엔 내 사진이 없다.), 서류 심사가 통과되어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처음 경험하는 제대로 된 면접이었달까. 재학시절 산을 탄 이력으로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행 가이드(Tour Conductor)를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알아 놓은 단어(TC)가 있었는데 갑자기 질문이 나왔고 잠시 당황하다 가까스로 기억이 나 대답한 것이 좋은 인상이 되었는지, 덜커덩 합격하고 말았다.

적어도, 최소한, 나는, 당장에는 백수가 아닐 수 있었다. 바로 연수를 받게 되었고 금강산 관광 여행 가이드 수업에 들어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뤄진 과정이었지만 나에겐 정말 구세주 같은 일이었다. 백수 탈출도 고마운데 연수중에 회사에서는 점심도 제공해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 결과가 나오는데 적어도 두 달이 걸리는데 마침 연수기간도 두 달이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할지도 알지 못하고, 여행 가이드가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당장엔 옵션까지 갖게 된 셈이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연수를 받고 나니 실제로 금강산에 가서 실전 연습을 할 기회가 생겼다. 동해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북한에 넘어가 금강산을 보게 된 것이다. 더불어 실제 가이드인 것처럼 온갖 전설과 사실관계 등을 풍부한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해 장황하게 설명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도록 연습해야 했다.

살다가 이런 경험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에게도 행운이라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한국전쟁 영화에서나 보던 총을 들고 있는 인민군 사이를 지나 차를 타고 숙소로 갈 때까지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긴장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장진항의 풍경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산 위에 대포라든지 군사 시설물들이 곳곳에 보였다.


여관(호텔)에 짐을 풀고 현지인들과 술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많은 어색함과 벽을 허물 수 있었다. 북한식 온천도 경험하고 남한 사람 욕하는 초등생들도 보고 식탁에 올려진 차가운 가자미 요리 맛도 보면서 북한을 체험했다. 또한 북한의 실제 가이드와 코스를 견학하면서 가이드를 위한 준비를 했다. 세 개의 코스를 복습까지 두 번씩을 돌았으니 금강산 구경은 충분했다.

문제는 호텔에서 해야 하는 가이드 실습이었다. 장황한 대사를 다 외워서 사람들 앞에서 읊어야 하는데 도대체가 어색해서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어설프게 꾸역꾸역 했을 것 같다. 내 적성에는 안 맞았지만 백수가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 남들 하는 정도로 해서 나도 그럭저럭 적응해 갔다.


짧은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복귀하면서 회사는 휴가를 줬다. 그때가 11월 초 정도였으니 시험 결과가 나온 상태였다. 나는 합격. 일단 작은 성공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기분이 좋았고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근데 문제는 갑자기 모 손보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게 문제인 게, 휴가를 마치고 가이드로 실전 투입을 하는 날과 겹쳤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고 탈락한다면 나는 또다시 백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6개월을 공부한 걸 활용할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그걸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나는 가이드를 관두기로 했다. 자존감도 좀 생겨서인지 백수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진짜 하고자 하는 일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동료 형님들(내가 거의 막내급이었다)과 작별인사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회사에서는 실컷 연수만 받다가 나간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했고 나는 지급받은 장비들은 모두 반납했다. 회사 입장을 이해하지만 나 역시 내 개인의 미래가 있기에 어려운 결정을 돌이키긴 어려웠다.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그 회사는 일종의 SPC로 남북관계에 따라 존폐가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쉽게 말해 고용보장이 되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나간 뒤로 1년 내에 상당수의 동료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더 나중엔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직이 없어졌겠지만 말이다.


사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난 그 면접을 치렀지만 결국 탈락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히말라야에 또 도전하겠냐는 질문에 고민하다 - 그나마 내세울 게 도전정신 정도니 - 가겠다고 답했다가 떨어졌다. 산악인을 많이 지원하는 회사라 그쪽에 가능성을 더 둔 말인데 잘못 찍었다. 쩝. 이로서 이제 다시 나는 영락없는 백수로 돌아왔다. 인생 참 녹록지 않다.


연말이 되어 다시 백수가 된 나는 어쨌든 자격시험 합격증 하나는 건졌다. 사회의 벽은 높았고 나는 또다시 불안해졌고 뭘 해야 할지부터 문제였다. 이런저런 기회로 을지로나 여의도 일대의 높은 빌딩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높은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곳에 일하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들과 같이,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도 있었다. 다만, 다만, 오직 돈이 없었다. 돈도 있어야 뭐라도 하니 말이다. 돈, 돈, 돈 미치도록 벌고 싶었다.


새해가 되어 일단 나는 실무수습 원서를 제출해야 했다. 합격증을 받고 나서는 원하는 보험사에 원서를 내야 했는데 다행히 내가 원하던 회사로 배정이 되었다. 어쨌든 희미한 희망의 끈은 갖게 되었다.

나는 또 다른 자격증(1종)을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지루하고도 오랜 기다림이었고 더욱더 어둡고 캄캄한 곳을 방향이 맞는지도 모르고 한 발 한 발 디뎌가는 기분이었다. (악필, 202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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