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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Apr 28.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4

열 번째 우리 집


이사는 중국에서 돌아온 후, 그리고 다시 중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뤄졌다. 계약기간 만료일이 한참 지난 후 가까스로 전세금을 받고 생애 첫 아파트 전세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하는 날부터 걱정거리가 한가득 있었으니, 계약하는 현장에서 집주인과 기존 세입자 사이에 분쟁이 붙은 것. 몇 번의 경험을 비춰봐도 전세 계약은 항상 긴장을 풀 수 없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날도 자금 조달과 이삿짐센터와의 조율 그리고 이삿짐 정리 등으로 민감해 있었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접하게 된 것이 매우 불쾌했고 불안했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서로서로 강한 ‘테이커’가 되어 조금도 양보를 안 하는 상황이어서,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결국엔 어떻게 해결이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계약을 하려니 참으로 찜찜했다. 그래서 입주를 하자마자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하자를 찾아 사진을 찍고 메일로 증거를 남긴다고 집주인에 보내기도 했으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나중 얘기지만 그 집주인은 너무도 좋은 분이었고 다음 이사를 할 때는 너무 편하게 해 주셔서 불안함에 떨던 2년의 기간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아파트 2층의 열 번째 우리 집에 우리 남매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단독주택에 살다 오니 마치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된 느낌? 혹은 적어도 남들 정도는 된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좋았다. 동생 역시 새로운 주거 환경에 만족을 넘어 행복이 극에 달한 것 같아 보였다. 또 한 단계 성장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사를 한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북경으로 파견을 나갔고 ‘우리 집’에는 동생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며 살게 되었다. 이후 나는 파견생활이 길어져 북경 생활을 1년 더 하게 되었다.


북경 생활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어서 신나게 생활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도 같이 간 동료들이 주재원으로 각자 보금자리를 찾아갈 때, 나 혼자 남은 기분이 들며 외로움이 극에 달하게 되면서 재미는 시들해졌다(나 혼자만 미혼이었고 파견자 신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에 대한 심한 목마름을 안고 영구 귀국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생활도 1년이 한계였던 듯하다.


나는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고 편안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푸르른 산과 들. 깨끗한 생활공간과 잘 조성된 공원 등등.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더불어 동생이 깔끔하게 관리한 집이 너무 좋았고  편안했다. 한국에서의 삶이, 그리고 그제야 열 번째 우리 집에서의 삶이 제대로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와 한 첫 번째 일은 차를 사는 것이었다. 기존 차는 중국에 파견 가기 전 거의 헐값에 처분했었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아쉬운 게 되어 버렸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도 가야 했고.. 무엇보다 결혼을 결심했으니 준비 차원에서도 필요해 보였다.

더운 여름날 동생과 함께 시골집에 새로 마련한 차를 갖고 시골에 갔는데 부쩍 늙어가는 부모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집에 도배도 해드리고 여기저기 수선과 정리를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나의 결혼에 대한 욕구는 진심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샘솟았고 중국에서부터 나름 전략도 짜 놓은 상태였다. 내가 중국에서 그만 한국에 보내달라고 회사에 지속적으로 졸랐던 명분도 결혼이었고, 나이도 이제 꽉 차서 다들 그걸 이해해 줬다. 마침 한국에 오자마자 주변사람들이 한결같이 나의 결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레 소개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나의 결혼전략이란 단순하면서도 허점이 많았다. 그러나 동기부여 차원에서는 괜찮은 전략이었다.

‘매주 빠짐없이 소개팅을 한다. 2달간 계속. 그중에 나에게 호감이 있는 여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랑 그냥 결혼한다.’

나는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재고 따지고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알고도 호감을 가질 여자는 별로 없을 거란 걸 알았기에, 나는 청소년기 혹은 젊은 20대의 기대치는 한참 전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저 두런두런 얘기하며 한 세상 같이 살 사람이 필요했다. 서로 의지하며 외롭지 않으면 그걸로 되었다.


그 시절 대표적 재테크 수단이었던 중국펀드를 깨서 아는 선배로부터 중고차 하나를 마련하고 나니, 고모로부터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다. 가족 친인척으로부터는 소개를 받지 않으려던 계획은 강력한 원칙 앞에 근거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다시 한번 유부녀가 아니라면 못 만날 이유가 없으며 경로 또한 상관없음을 확고히 했다.

그렇게 첫 소개팅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두 번째 소개팅은 중국에서 만난 남자 후배가 주선. 그렇게 또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세 번째 소개팅은 중국에서 만난 여자 후배가 주선. 그렇게 또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 세 번째 만난 여자는 1년 후 공식적인 나의 아내가 되었다. 아직 두 달이 안 되어 남은 미지의 여자들은 어찌할까 고민을 했지만, 그 허술했던 계획만큼 마음도 갈팡질팡 했지만, 마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일은 진행되었다.


한편 회사에서는 새롭게 맡은 업무에서 심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치 중국에서 실컷 놀다 왔으니 일 좀 해야지, 하는 것처럼 회사는 나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다. 낯설건 말건 모든 미션이 나에게만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쨌든 꾸역꾸역 해내긴 했다.


아직은 젊고 민감한 시기, 신경은 날카롭고 삶은 팍팍했다. 유일한 위안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과 새롭게 들리게 된 클래식 음악. 하늘공원 억새밭 앞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듣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은 당면한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주었다.


그 당시 회사에서 술을 퍼 마시고 택시를 탄 뒤 집 근처에서 시비가 붙어 성깔을 부리는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행동을 했던 걸 보면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차분하고 사람을 진정시키는 듯한 여자친구의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아파트 생활은 이제 익숙해져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래도 출퇴근 시 집을 나서거나 들어갈 때 느끼는 뿌듯함은 남아 있었다. 쾌적했고 주변 공간도 운동하기 좋았다. 촌스럽게도 문득문득 그랬다. ‘내가 이런 데서 살고 있다니’.


어쨌든 결혼에 대한 자신감은 생겼고 꿈같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여자친구랑 200일 기념 식사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작은 이모가 전화가 왔고, 이런저런 얘기의 핵심은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였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여자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그리고 결국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짧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래도 시간이 걸린 게 있다면 여자친구의 컨펌이었는데, 내가 결혼 얘기를 한 후 두어 달간은 답을 안 하다가, 이제 이사할 때가 되어 동생이랑 집을 구하러 다닌 얘기를 했는데, 뜻밖에 자기 동네에 집을 얻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고, 그다음부터는 모든 게 결혼 버전으로 일이 이뤄졌다.


전세 얘기 다음날 집을 알아봤다는 얘기부터, 예비 장인어른의 전세금 지원, 처음으로 여자친구 부모님 인사 가는 일, 결혼식장 잡는 잡는 일이 순차적으로 거의 일주일 사이에 이뤄졌다. 여자친구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며 회사에 찾아오는 일까지 생길 정도로. 나는 이 기회 아니면 결혼 못 할 것을 직감했는지, 여자친구도 설득해서 원안대로 했고 아버지한테도 결혼식장 잡히는 날 안 하면 결혼 안 한다고 엄포까지 놓으며 밀어붙였다.


나는 여자친구 집 바로 앞동에 집을 얻게 되었고, 결혼하기 두 달 전에 미리 살게 되었다. 운명이 이상한 거 같지만, 이미 이런 일 그동안 한 두 번 겪는 것도 아니어서 그다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집을 얻고 결혼 준비를 하게 되면서, 영화-식사-차의 연애 패턴은 사라졌고, 뭔가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하는 과정이어서 더 좋았고 더 친해지게 되었다.


그 집이라는 것이 결혼 승낙의 매개가 되어 내 인생의 훌륭한 전환점을 만들어 준 셈. 내가 열 번째 우리 집을 떠날 때는 처음으로 나와 여동생이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 남매에게는 꿈은 꾸었지만 실현가능성이 낮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고 가장 큰 도약을 이룬 것이기도 했다. 삶은, 앞으로의 일은, 쉽게 속단할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악필, 202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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