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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Jun 09.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6

열두 번째 우리 집


아이가 생겼으니 우리는 누가 뭐래도 부부였고 가족이었다. 식구가 늘었다는 걸 감안하여 좀 더 넓은 집으로 가기로 했다. 헌 아파트였지만 우리는 새 식구 생각에 도배도 하고 장판도 깔아 새집처럼 꾸몄다. 그 집에서 기어 다니던 아들은 걸음마를 했고 뛰어다니게도 되었다. 아들의 유아기 추억은 이 집에서 시작하고 만들어진 셈.


아내는 육아 휴직을 하고 아들 키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소화를 시키고, ‘사경’으로 물리치료를 할 때 아파하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아이가 활짝 웃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따라 웃고, 외할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가운 얼굴로 현관으로 전속력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한편 비교적 가끔 보는 아빠에게 놀아달라며 신발을 들고 눈물짓는 아이를 보고, 아이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어쩔 수 없이 흐르기 전에 아이 앞에서 먹어 치우자 서럽게 엉엉 울던 아이를 보며, 엄마와 아이가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을 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참 운이 좋은 놈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위기도 많았다. 아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제대혈(?) 문제로 큰 병원에 가기도 했고 엄마의 신종플루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더니만, 태어나고 나서 ‘사경’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몇 개월을 장인 장모님의 도움으로 통원 치료를 해야 했다.

한 번은 아이가 거봉을 먹다가 목에 걸려 부랴부랴 애를 거꾸로 뒤집고 빼준 식겁한 일도 있었고 미끄러져 침대 모서리에 턱이 찢어져 꿰맨 적도 있었다. 열이 안 떨어져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고 눈에 눈썹이 끼어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수시로 발생하는 감기 등은 맘을 놓을 수 없게도 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이상한 말을 배워와 엄마에게 못된 말을 할 땐 매우 엄하고 무섭게 혼낸 적이 있는데 바로 후회하고 안아줬던 기억도 있다.  

이러한 유아기를 나도 거쳤겠거니 생각하니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났다. 그 옛날 병원도 먼 시골에서 어린 나를 두고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난 완벽하고 멋진 아빠가 될 것을 아이가 태어날 때 다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참 많은 것이 어설펐고 부족했으며 결국 아내와 장모님께 거의 모든 걸 의지하고 맡겨야 했다.


열두 번째 집에 살 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아들의 돌잔치가 있었고, 여동생의 결혼 그리고 처제의 결혼이 있었다. 오랫동안 변화가 없던 집안에 많은 일들이 이뤄진 셈.


아버지는 오매불망 그리던 아들의 결혼에 손자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딸의 결혼도 보게 되었고 외손녀도 보게 되었다. 걱정이 많았던 여동생이 서글서글하고 착한 신랑을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처갓집의 둘째 딸인 처제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곧 아들도 낳았으니 장인 장모님 입장에서도 많은 변화를 겪은 셈이다. 마침 이 집에 있을 때 처제는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잠시 우리 집에 기거하며 아기를 본 적이 있다.


한편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썩 좋지는 않았는데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며 나름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는 계셨다. 젊어서 고생한 탓에 관절 여기저기가 아프고 통증이 지속되어 힘들어하셨지만. 그러다가도 종종 술을 드시고 다치시기도 했고 잘못된 건강식품을 구입해 당뇨가 악화되기도 했다. 아들로서 고생하신 아버지의 노후를 충분히 관리해 드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종종 느끼는 나의 한계로 괴롭기만 했다.

한 달에 한 번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인사드리긴 했지만 그걸로 부모님의 생활을 완전히 관리하기는 힘들었다. 두 분 모두 늙고 힘든 몸이 되었다. 혹시나 주변에 돌보미 아주머니도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주간보호센터가 없던 시절이다. 그저 정기적으로 내려가 봐 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시골 내려가는 게 쉽지 않았을 테지만 큰 불평 없이 이해해 주었다. 미혼 시절 꾸던 결혼 후 악몽(시골 부모님 집에 아내와 자식들이 가길 거부하는 꿈)은 해결된 셈.


어쨌든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돌아가셨다. 그게 아버지 생신으로 찾아뵙고 한 일주일쯤 후였으니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봄바람 불던 3월 초 밭에 불을 피우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차를 타고 여동생네를 데리고 시골에 가는데 운전하는 내내 엉엉 울었던 거 같다. 뭔 감사의 말도 옛날 얘기도 제대로 못한 채 그렇게 갑자기 가시니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맘이 아팠다.


장례를 치르고 뒷정리를 하는데 문득 여동생은 어머니를 자기가 모신다고 했다. 어머니는 절대 혼자 지내실 수 없는 상태. 아들로서 역할을 못한 것도 미안하지만 나 때문에 제대로 배울 기회도 못 가진 동생이 그러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게 현실일 뿐. 동생은 그 억울함을 어디 두고 닥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을까. 고맙고 미안했다.


아버지로 인해 많은 회한과 아쉬움, 그리움이 남았지만, 남은 우리는 또 살아야 했다. 인생에서 이렇게 큰 빈자리를 느낄 때가 있을 거라는 걸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닥친 느낌은 여파가 컸다. 그저 똑같이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내가 못된 놈 같았고 무력감에 멍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삶이 그저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길, 단지 희생만 한 것은 아니었길, 삶에서 보람과 뿌듯함을 갖고 계셨길, 자식인 나와 동생이 잠시나마 기쁨이었길, 그래서 그저 기분 좋게 술 한잔하고 잠든 것처럼 개운하게 가셨길 바란다.


한편 회사에서도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극도로 힘든 시기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안정을 찾았고 부서도 옮겨 새로운 생활도 하게 되었다. 먹고사는 것이 쉬운 건 아니니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신선한 경험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열두 번째 집에서 우리는 갱신을 해서 4년을 살았다. 도로 옆이라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넓은 공간을 비교적 저렴한 전세금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정이 든 공간이 되어 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전세금은 급격히 치솟았고 우리가 불합리하다고 느낄 정도로 감당하기엔 과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과감히 매매를 알아보았으나 시장 상황을 눈치챈 집주인은 하루가 다르게 집값을 올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 대출에 극도로 민감한 아내의 내키지 않는 눈빛도 있어 한 두 번 더 알아보다 아예 포기하고 다른 전세 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이번엔 급격히 오른 전세금 반환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반전세로 전환했다. 다른 단지의 햇빛이 잘 드는 1층집.


기존 집에 먼지가 많이 날리는 느낌이라 불편했는데 이번엔 앞이 조용하고 햇빛이 잘 드는 집이라 맘에 들었다. 정처 없이 떠돈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아직은 우리 형편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떠돈다는 게 그렇게 나쁜 것 같지도 않고. (악필, 20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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