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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Jul 15.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7

열세 번째 우리 집


이번에 간 집은 기존보다도 더 넓은 평수의 집이었다. 1층이었지만 바로 앞에 화단이 있고 햇볕도 잘 들어와 밝고 화사한 느낌이 좋았다. 더욱이 우리 집 앞은 다른 동이 없어서 더 확 트인 느낌이 들었다. 또한 바로 앞에 할인마트가 있어 쇼핑이나 외식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이 아무리 뛰어도 아래층에 대한 부담이 없었으니 여러 모로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었다.

평수가 더 넓어지니 3 식구가 살기엔 너무도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전과 다르게 화장실이 두 개. 청소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편한 건 사실이었다. 반전세이니 전세금 반환에 대한 부담도 덜해 맘도 편했다.


나는 30대 후반에서 이제 마흔에 접어든 회사원으로서 점점 더 유부남이 익숙한 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업부서에서 생활도 적당히 익숙해져가고 있었고.  


아들은 다섯 살이 되었고 한참 귀여울 때였다. 아들은 기존에 살던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 집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랑 아내는 출근할 때 차로 자고 있는 아들을 처갓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여전히 장모님은 아들을 책임져 주고 계셨던 것.  그러다 보니 아침에는 항상 바빴다.


어머니는 동생 네에서 생활을 했는데 다행히 잘 지내고 있었다. 그 좁은 집에서 아주 어린 딸을 키우며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동생은 고생이 많았다. 종종 들러 같이 사는 모습을 보고 지원도 해줬지만 어디 당사자의 어려움만 하겠는가.

얼마 안 있어 동생은 둘째까지 갖게 되었고 나중엔 시골 고향 근처에 신랑의 일자리를 따라 내려가게 된다.


이 무렵 나는 부서의 권장도 있고 개인적으로 좋아도 해서 골프 칠 기회가 많았는데, 마침 집에서 가까이 드라이빙 레인지가 있어 연습하기도 좋은 환경이 되었다. 아예 골프화를 신고 가서 아침에 운동하고 오기도 했고 저녁에 가기도 했다. 이때가 실력 향상에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 같다.


한편 우리 부부는 이 집에서 살 때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맞는다. 바로 경제문제의 정리다. 이전엔 딱히 정리된 게 없이 어정쩡하게 관리하던 것을 명확하게 한 것.

계기는 나의 통장의 비밀번호까지 아내에게 알려주며 투명함을 자부(?)하던 차였는데, 어느 날 아내도 호기심에 본 것으로 불편한 기색이 있었고 나 또한 일일이 간섭받는 느낌이 들어 서로 감정이 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생활비와 교육비 조로 일정액을 아내에게 보내주고 상호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 그래서 지금까지도 서로 수입과 지출을 모르고 관여도 안 한다. 아내는 충실히 생활비와 교육비를 관리해 왔고 오히려 알뜰하게 쓰고 남겨 집을 구할 때 보태기도 했다. 나 역시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차곡차곡 남은 돈을 모아 미래를 대비하고자 했다.

이 정리는 안정적 부부생활을 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자 소신껏 자유롭게 자산관리를 하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기회였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우리 부부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사람이 사는 동안 이만한 행복이 있을까 싶을 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종종 아프긴 했지만 갓난아기 때보다는 훨씬 덜했고 데리고 여기저기 다닐 만큼도 되었다.

주말에 우리 부부는 아들과 나와 아파트 공터에서 공놀이도 했고 술래잡기도 하며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인생은 결국 이런 맛에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행복감 넘치는 삶의 환경이었지만, 어디 삶이 항상 원활하기만 하겠는가.

우리 집이 1층이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어야 했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입주민이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그 냄새는 고스란히 1층으로 내려와 우리 가족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 번은 담배 냄새에 화가 난 한 주민은 1층인 우리 집에서 피는 줄 알고 항의 방문을 하기도 했다. 공공주택의 담배 냄새는 정말로 화나는 일이다. 한 때 나 또한 담배를 피웠지만, 남이 피운 담배 냄새 때문에 아이에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불쾌감이 하늘을 찔렀다. 사실 이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의 가장 큰 게 담배 냄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편 내가 영업부서에서 일을 하다 만난 한 거래처에서는 어마어마한 음주파여서 수시로 음주 대응을 해야 하는 어려움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시비 거리에서 긴장된 일들도 많았고 잠자던 한 밤중에 전화를 받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집도 없고 충분히 저축해 놓은 것도 없으니 끝까지 회사를 다녀야 하는 현실 때문일까, 회사를 관 둘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나이가 40이 넘어가면서 과도한 음주가 점점 힘들어졌고, 종종 허리도 아픈 게 여기저기 불안한 면들이 있었다. 이 시기 골프 말고는 딱히 운동이라 할 만한 것을 하지 못했다. 가까이에 있는 천변을 걷거나 아주 가끔 뛰는 것이 전부라 할까. 산에도 못 가던 시기니 몸도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다.


한편 나는 이 무렵, 승진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옮긴 부서에서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 가점 등을 따서 승진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이것저것 자격증 공부도 했고 영어도 다시 시작했다. 거래처 접대 등 장애 요소들이 있었지만 너무도 공부도 안 하고 책도 안 보던 삶이 싫었던 모양이다.

이 시기 시중에 나와 있던 고전이나 필독서 등을 찾아 읽다 보니 공부에 대한 흥미가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자격증도 마침 목표한 대로 땄고 영어 점수도 괜찮았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한 게 대학원 진학. 회사 근처에서 업무 끝나고 다닐 수 있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정말 아무도 모르게 했다. 어느 날 음주 후 휴가 내고 그냥 질러버린 게 덜커덩 합격. 무사히 완주할지 확신도 없으면서 등록까지 해버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승진은 안 되었고, 다시 원래 부서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생긴 일. 어쨌든 익숙한 부서로 옮기게 되어 부담은 별로 없었고, 어떻게 대학원을 조용히 완주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다행히 대학원 생활은 매우 운이 좋아 만나는 사람들도 좋았고 공부도 재미있었다. 책도 눈에 잘 들어왔고 마치 대학 신입생이 된 것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대학원 진학은 대단히 훌륭한 선택이었다.


회사 일도 여유가 생겼고 이런저런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일머리도 잘 잡혔다. 더불어 대학원과 관련된 지식을 업무에 접목하다 보니 더 큰 그림이 보였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우린 또 이 집을 떠나기로 했다. 벌써 2년이 지나 계약 만료. 월세 부담도 있었고 이미 다 오른 전셋값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엔 아예 처갓집과 같은 동에 집을 운 좋게 얻어 가게 되었다. 마침 집주인이 내부 인테리어를 해 놓기로 해서 좀 더 비싸더라도 가기로 했다. 새 집이나 마찬가지 느낌.


아들은 커서 이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상태였고 나도 회사에서 부서 옮긴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뭔가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악필, 202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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