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러닝크루
앞서 나의 달리기 입문과정을 숨 가쁘게 서술했지만, 나의 달리기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스마트폰 세상이 만들어낸 SNS의 역할이다.
그러니까 한 6,7년 전 역시 잦은 허리부상으로 다시 산을 찾게 되었을 때도 활용한 것이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그리고 블로그나 카페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나의 활동을 업로드하며 나 스스로 동기부여를 계속해서 만들어 간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을 달리기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입문 초기 나의 달리기 패턴을 만들고 몸도 달리기에 익숙해지도록 거의 매일 뛰다시피 했는데, 전부 다 어떤 식으로든 포스팅을 했다.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느낌상, 자랑질이다, 도파민 과다다, 응원한다, 멋지다, 대단하다 등등의 반응으로 이해했다. 어떤 것이든 사실 나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숙제처럼 일기처럼 나의 활동을 포스팅하다 보니 어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나를 자꾸 달리기를 계속하게 만들었으니까. 그 동기가 자랑질이었건 과시였건 나의 의지의 표명이었건, 어쨌든 나는 그로 인해 달리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설사 아무 반응이 없더라도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예외 없이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봤고, 온라인상 표시는 안 해도 우연히 나를 만나면 맨 먼저, 왜 그렇게 달리느냐, 고 질문부터 하기 일쑤였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 묘하게도 그건 내게 힘이 되었다. 내가 달리고 그 달리는 것을 포스팅한다는 행위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종종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로서는 이게 의미가 있나, 하고 망설여질 때도 있었지만, 고민하는 사이 올려버리면 고민은 끝났다. 누군가 댓글을 달고 반응도 했고 그건 그저 그것뿐이었다. 관심을 갖는 건 맞지만 그것 그저 지나가는 가벼운 관심이고 그들의 삶에서 거의 무시할 만한 관심이다. 내가 신경 쓸 게 거의 없다는 뜻. 그러다 보니 나는 계속하게 되었다.
요즘 러닝이 대세가 되고 젊은이들 사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는데, 그들은 주로 러닝크루, 즉 같이 달리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고 활동을 한다. 거기서 달리기 입문도 하고 계획성 있게 훈련도 한다.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혼자 하기 힘든 달리기를 훨씬 수월해지도록 서로 돕는다.
나 역시 달리기에 관심이 생기고 벌써 6개월째 러닝에 빠져 있지만, 사실 러닝크루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다. 만나느라, 훈련 같이 하며 서로 의식하느라, 혹시 아니 필시 하게 될 뒤풀이 하느라, 그리고 다시 집에 오느라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많아 보여서다. 그냥 조용히 혼자 뛰고 혼자 회복하고 싶다.
그런데 온라인상으로 이걸 공유하고 힘과 응원을 얻는다면 오프라인상의 러닝크루에 참여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전문적인 코치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인 러너가 있는 러닝크루에 가입한다면 자세교정과 주법 수련 등을 통해 훨씬 더 빠른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러닝크루의 단점들을 얼마나 상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온라인 크루. 나의 현실에서 이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 물론 앞서 말한 다양한 형태의 SNS는 또 하나의 훌륭한 ‘온라인 러닝크루’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좀 더 친밀한 친구들과 같이 비슷한 걸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자연스레 대학동기들 간 러닝모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 입학 30주년이라고 만난 친구들 간의 폭주하는 카톡방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 생각해 보니 그 흔한 마라톤 모임 혹은 러닝 모임이 없는 건 의아스러웠다.
역시 평소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나로서는 남이 하는 걸 기다렸다가 적당히 발 담그고 향유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나답다. 근데 문제는 심각하게 빠진 나의 일명 ‘러닝 뽕’. 다른 건 눈에 잘 안 보였다. 마약 중독에 버금가는 뽕을 맞고 나니 우선 급한 게 나였다. 그리고 뽕의 특성은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 아쉬운 놈이 우물 파고 더 사랑하는 놈이 어쩔 수 없이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친구들이 안 하면 나 혼자라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상의 전 세계 온라인 러닝 클럽에 가입해서 돌아다녀도 어느 정도 해결은 되는 문제였다. 그래도.. 그래도 친구들과 한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마침 달리기 패턴을 만들기 적당한 챌린지방(스쿼트 챌린지)이 오픈되어 한 두 달만 할 생각으로 달리기를 챌린지로 걸고 참여해 있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딱히 러닝크루를 할 정도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거의 나 혼자라고 생각하고 이미 유튜브나 다른 채널로 많은 학습을 해온 상태라 나의 러닝을 만들 자신이 좀 생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런뽕’은 심해졌고(템즈강 런을 하던 무렵이다), 나는 나만의 달리기에 집중하고자 과감히 방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때, 뭔가 아쉬워하는 친구들이 있는 거 같아, 달리기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어 보이는 친구들과 톡방을 만들어 보기로 했는데.. 그게 러닝방이 되고 ‘온라인 크루’ 비슷한 게 되어 갔다.
사람은 꼭 그게 흔히들 말하는 재수 없는 ‘자랑질’ 말고도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그런 게 좀 있는 거 같다. 뭐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그걸 자연스레 할 수 있게 적당히 판을 깔아준 게 SNS고, 그게 술 먹고 누굴 붙잡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며 나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거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정확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말이 느려 말토막이 잘려 답답하고 억울한 잠자리를 보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다음날 속 쓰린 것도 없고.
이제 달리기에 관한 한 그런 장이 하나 더 마련된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 간이니 좀 더 가볍게 그날의 달리기를 올릴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친구들이 올린 달리기 인증을 보고 멍 때리고 있다 뛰쳐나가기도 몇 번. 분명 상호 보완적인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뽕이라도 지칠 때가 있는데 그런 지루할 틈을 친구들의 응원으로 채워 극복해 낼 수 있는 상황까지 되었다.
부상 얘기, 건강 얘기, 극복한 얘기 등등. 50대에 접어든 친구들의 흔한 모습이다. 그런 표현과 간증은 본인 스스로에겐 해소이고 듣는 친구들에게는 동병상련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정보가 된다. 동료애는 물론이다. 고마운 일이다,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가장 흔한 패턴의 운동화 → 러닝벨트 → 무릎보호대 → 모자 순의 문의와 답변도 가면서 진화하고 발전적이다. 참으로 재미있고 건강하다. 어디 외로울 틈이 있겠나. 역시 고마운 일이다,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친구들과의 러닝크루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간혹 맘과 시간이 맞아 오프라인에서 같이 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문적 러닝크루도 아니고, 각자 뛴 경험도 달라 속도도 맞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편안한 친구들 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런 우려는 금세 해결되었다. 속도 빠른 친구들이라고 노상 그렇게 뛰는 것은 아니다. 속도 느린 친구들이라고 아무리 해도 걷는 거보다는 빠르다. 분명 같이 뛸 수 있는 속도는 나온다. 역시나 같이 뛰어졌고 함께 할 수 있었다. 이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꽤 괜찮다. 이 또한 고맙지 아니한가,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아, 하나 더 있다. 대회를 같이 나간다면 이건 또 다른 맛이다. 같이 뛰기는 어렵겠지만 - 이런 친구들도 있다 - 같이 모이고 흥분 속에서 같은 코스를 뛰고 그러고 나서 함께 축제를 즐기듯 마무리하는 건 확실히 친구라서 가능하다.
내가 등산을 하면서도 인터넷 산악회는 왠지 맘이 안 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런 것과 비슷한 걸까. 편한 사람과는 뭘 해도 재미있고 의미도 커지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아무리 좋은 걸 해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서먹함이 있고 잘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온라인 러닝크루. 더 나아가 다른 러닝크루 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온라인의 끈은 어쨌든 유지해야 할 테니.
덕분에 나도 많이 성장하고 있고 더 빠르게 폭풍 성장하는 친구들을 보기도 한다. 50살 넘어 성장이라. 그러면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대신 건강하게 성장하자. 나이 먹어 성장이 좋은 건 적당히 아파줘서 그야말로 ‘적당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서가 아닐까. 천천히 성장하는 걸 즐길 줄 나이도 되었으니 더 욕심 낼 것도 없다. 이렇게 인생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악필, 2024.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