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보고 싶어 쓰는 글
엊저녁 자려고 누웠을 때도 오늘 아침 눈 떴을 때도 오래 전 출근길에 외면했던 아기 고양이가 떠올랐다.
겨울, 새벽에 가까운 아침,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아기 고양이는 역을 오십 미터 남짓 앞둔 사거리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어떤 일부터 쳐내는 게 효율적일지 가늠하고 있었다. 밀려 들어오는 푸시알람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뛰듯이 걷다가 스치듯 아기 고양이를 발견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표정 같은 것이 보이진 않았을 텐데, 나는 그후로 줄곧 쓰러져 있던 아기 고양이의 표정을 본다.
그때 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갈 길을 갔다. '누군가 저 아이를 안아 들고 병원에 데려가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다친 고양이를 응급실에 데려가려면 어디에 전화해야 하지' '이 동네에 동물병원이 어디 있었지' 생각하면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그 시절의 나는 불건강했을까. 어째서 외면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출근길이라고 해도. 아무리 초단위로 짜인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야 하지 않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라고 생각하는 나를 꾸짖고 걸음을 멈추고 그 차가운 거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존재를 구해야 하지 않았나. 책임질 수 없더라도 구해야 하지 않았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비슷한 서사로 변주되는 꿈을 꾸었다. 변하지 않는 이미지는 아기 고양이의 표정. 그 날의 나는 거꾸로 봐도 똑바로 봐도 일을 사고 없이 마치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을 제거한 부품이었다.
그 겨울로부터 6년 후, 겨울.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고양이라는 생명체와 공존하게 됐다.
이 고양이를 내 편협한 언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늘 말이 막힌다. 뭔가 너무 크고 거대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게 된다.
이 생명체는, 나에게 언어가 아닌 비언어적인 모든 것으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우게 한다. 기억하게 하고 알도록 한다. 놀랍고 경이로운 경험, 새로운 차원이 열어젖혀진 느낌이 내 어깨를 툭 툭 치며 말을 걸어온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들이닥친 고양이는 길에서 태어났다. 어떤 이유에서건 엄마 고양이가, 어느 마당 있는 집 나무 데크와 돌 틈 사이에, 아기 고양이를 두고 사라졌다. 그 집은 강릉에 있는 가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냥 두면 얼어 죽을 것 같아, 어떡하지?’ 하고 전화를 걸어온 가족은 아기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방의 온도를 평소보다 높게 데웠다.
소식을 들은 나는 아기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검색해 배송시켰다. 고양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추정컨대 이 고양이 나이가 60일 정도 되었을 무렵 나는 이 생명체를 처음 마주했다. 강릉 집은 며칠씩 비어 있을 때가 잦았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 집에 있었으므로, 아직 어리고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의 어린 고양이는 나랑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가족의 판단이었다.
거실 한 구석에 이동장이 놓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온 고양이는 곧장 방으로 달려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침대 밑바닥 모서리 구석까지 청소기 헤드를 넣어 먼지를 치워두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책상 아래 쪼그려 앉았다. 인사를 하고 싶었다. 잠자코 고양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고양이는 신중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고 내 앞에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아마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를 골똘히 보던 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똘망똘망 동그랗고 호기심 가득한 눈.
내 존재가 위협적이지 않길 바랐는데, 다행히 그다지 위험으로 느끼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털을 바짝 세우고 경계할까봐 쌓아 올린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유투브를 통해 미리 공부한 바에 따르면 간식이나 밥으로 긍정적 기억을 심어주고 조금씩 가까이 가라고 했는데, 그 모든 가르침을 적용해 볼 필요도 없었다. 고양이는 나와 한 뼘 만큼의 거리를 두고 앉았고 나와 내가 지내는 공간을 천천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석 달. 바깥이 안보다 추운 날들에 고양이는 나와 함께 지냈다.
고양이가 제일 자주 자리잡는 곳은 책상 위였고 그 다음은 침대 위였다. 나는 책상 옆에 있는 책장 가장 위 칸을 비우고 먼지를 털어냈다. 고양이가 커감에 따라 최애 공간은 책상 위에서 책장 위가 되었다. 고양이는 그곳에 누워 줄곧 책상에 앉은 나를 내려다보거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고양이 밥시간에 맞춰 기상했다. 하루 두 번 고양이가 스스로 고양이임을 잊지 않도록 줄에 매달린 사냥감을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흔들었다.
처음, 그러니까 최초로 낚싯대에 달린 쥐 모양의 사냥감을 낚아챘을 때, 이 고양이가 으르렁거리던 소리를 기억한다. 자세를 바짝 낮추고 사위를 경계하다가 물고 있던 사냥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침대 아래로 걸어 들어가던 뒤통수. 나는 고양이가 물어가도록 낚싯대를 놓고 부엌으로 갔다. 제일 좋아하는 참치 캔을 뜯어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맞다 너 고양이지'
'나랑 같이 침대에서 자고 내가 눈가를 쓰다듬을 때 그릉그릉 소리를 내고 아침마다 나에게 졸린 눈으로 눈인사를 해주지만, 너 고양이지'
'고양이과 동물에는 호랑이가 있고 사자가 있고 표범, 치타, 삵... 그런 맹수들이 있지...'
'어떻게 배우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할까. 저게 본성이라는 걸까'
'그러니까 너는 고양이고 고양이답게 살아야 하겠구나'
'방금 너 엄청 뿌듯하고 엄청 자신감 생겼겠지?'
그런 생각들을, 눈이 번뜩이는 고양이 앞에 참치를 옮겨담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했던 것 같다.
책장 위에서도 책상 위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폴짝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 무렵, 고양이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갔다.
날이 더워졌고 강릉 집에는 뛰어 놀 수 있는 마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놀면 네가 장난감 흔드는 것보다 훨씬 좋아할 거야" 라는 가족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에 돌아간 고양이는 실로 행복해 보였다. 타고 오를 나무가 있고 자세를 바짝 낮춰 몸을 숨길 잔디가 있다. 그밖에 향이 나는 꽃, 향이 나지 않는 꽃, 촉촉한 흙, 메마른 흙. 그리고 내가 아무리 요령을 터득해 흔들어도 완벽히 따라할 순 없을, 수많은 실재하는 생명들. 이를 테면 새, 쥐, 개구리, 각종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곤충, 등등. 그리고 바람. 뜨거운 바람, 선선한 바람, 안개 낀 촉촉한 바람, 등등.
고양이는 마당냥이로 지내기 좋은 계절에 강릉 집에, 실외가 추워 따뜻한 바닥이 필요한 계절이나 강릉 집이 오랫동안 비어있을 때 내가 있는 도시 아파트에 번갈아 가며 지냈다.
나는 고양이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으나 이 고양이가 어디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할까를 생각해보면 결론은 늘 명확했다. 뭘 쫒고 있는지 잔디밭에서 전속력으로 내달리다 커다란 나무 끝까지 올라가는 고양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감히 내가 좁은 방으로 저 생명체를 데리고 들어가도 될까 생각이 복잡해지곤 했다. 그래서 고양이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땐, 머나먼 강릉으로 원정을 가기 시작했다.
강릉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내게 몸을 기댄다. 내 무릎에 작은 이마를 부딪쳐 준다. "잘 지냈어?" 묻고 곁에 앉으면 다리 위로 올라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눕는다. 그럴 때 나는 잊고 지내던 삶의 행복, 기쁨 같은 감정들을 모조리 받아 안은 기분이 든다.
고양이는 내가 머무르는 며칠간은 어디 가지 않고 집 안에 있어준다. 며칠만 머무르다 떠난다는 걸 이제 아는 것 같다. 내가 짐을 푼 방에서 낮에도 밤에도 배를 들어낸 채로 자고, 내가 책을 읽을 땐 무릎 위에서, 밥을 먹을 땐 식탁 아래에서 내 발등에 따뜻한 엉덩이를 맞대고 있어준다.
제일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산책길이다. 해질 무렵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작은 공원에 다녀오는 산책에 함께 걸어준다. 처음엔 내가 고양이를 따라 걸은 산책이었는데 몇 번 같이 걷다보니 이젠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맞춰서 걷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양이가 저 멀리 달려 나갔다가 내가 따라올 때까지 멈춰서 기다려줄 때, 길가에서 수풀로 사라졌다가도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빼꼼 나타나 빠른 걸음으로 내 옆에 다가올 때, 그럴 땐 언제고 여지없이 마음이 녹는다.
나는 그곳에 있는 짧은 며칠 동안 이전에 느낄 수 있던 행복과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을, 호사를 누린다. 같이 살 땐 소소하게 흩뿌려져 있던 알갱이 같은 행복이었다면, 내가 원정을 가야만 고양이를 볼 수 있게 된 지금은 똘똘 뭉쳐 응축된, 거대한 결정체 같은 행복이다.
나는 힘들 때 보러 갈 고양이가 있는 인간 동물이고, 그 사실은 나에게 든든한 위로다. 가까운 곳에서도 먼 곳에서도 고양이는 나를 구한다.
가끔 아니 자주, 고양이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해서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우리 고양이가 행복하려면 언제고, 마당이, 자연이 필요하다. 이미 마당 생활에 적응한 우리 고양이는, 갇힌 공간에 지내는 일이 상당히 답답할 것 같다. 그러니까 아마도 정답에 가까운 방편은 내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될 텐데...? 그것은 몹시 아주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틈이 이 생명체와 함께 지내는 일을, 삶의 방식을 궁리해보게 된다. 현명한 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의 내게 기대를 걸어 본다.
그 겨울, 칼바람이 불던 출근길에 외면했던 아기 고양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고양이와 만나게 된 건 아닐까 종종 생각하곤 한다.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지금껏 내가 알고 배운 모든 방식으로 이 생명체를 이해하고 다정함을 퍼부을 기회를, 감사하게도 얻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쯤 우리 고양이는 아침밥을 먹고 밭고랑 사이에 옆으로 누워 있을 것이다. 나른나른 눈을 깜빡이겠지. 꾸벅 꾸벅 졸다 눈을 감고 턱을 괼 것이다. 고양이가 자리를 잡은 그늘에는 무성하게 자라난 덩굴 사이로 오이꽃이 노랗게 피어 있을 것이다.
여름. 장대비가 퍼붓는 아침. 강릉엔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는 예보를 확인했다.
고양이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쓰는 글.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