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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애희 Jun 18. 2024

김환기_우주(Universe 5-XI-71 #200),

네모 속에 담긴 우주


멀리서 보았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았다.


네모들의 행렬

고등학교 학창 시절 적었던 ‘깜지’ 안의 수많은 글씨들처럼 작은 네모들이 빽빽하게 모여 아주 큰 네모를 가득 채웠다. 네모들은 모두 자기만의 표식으로 점 하나씩 가지고 소용돌이치고 있다. 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하며 소용돌이 속을 넘나들고 있다. 쏴아~~~ 빠져나가는 썰물과 함께였다가 철썩철썩 들어오는 밀물과 함께하며 물방울이 된 나는 썰물과 밀물 어디쯤을 탐험했다. 세상에 태어나 희망이라는 점 하나를 소중히 품고,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지만 앞만 보고 나아가 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뒤를 보게 되었다.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놀이 기구 기다리는 사람들.

한껏 들떠서 콘서트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슬픈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애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코로나로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서 있는 마스크 구입하려는 사람들.

코로나 검사를 위해 보건소를 빙 둘러 늘어서 있는 사람들.

출발 신호와 함께 서로 다른 보폭과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 마라톤 선수들.

호수를 따라 하나! 둘! 줄지어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

이른 새벽 눈 비비며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수영장 신규 등록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귀향길 고속도로 위 자동차들과 그 안의 사람들.

하늘 높이 치솟으며 나란히 서서 서로 뽐내는 아파트들과 그 안의 창문들.

아프리카 광활한 초원을 이동하는 코끼리들.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철새들.

태어난 곳을 향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

한 줄 기차의 정수를 보여주는 개미 떼.

시골 길 깜깜한 밤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별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줄줄이 서있는 가로수들.


우리 인생에서 마주하거나 겪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이야기를 품고 네모로, 네모로 연결되었다.


김환기_우주(Universe 5-XI-71 #200), 1971

네모들의 만남

네모들이 모여 긴네모를 두 개 만들었다.

긴네모 둘이 만나 우주가 되었다.

너와 내가 만나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문득, 수화와 향안이 떠올랐다.


인생의 2장이 새로운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만든 이름’으로 불렀고, 실제로 남편의 남은 인생을 그가 꿈꾸던 좋은 것들로 채워주었다. 남편은 아내를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이름’으로 불렀다. 결혼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환기에게 아내 김향안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김환기에게 아내 김향안은 또 다른 자신이었던 것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긴네모는 김환기와 김향안이 되어 나에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베르나르 뷔페_생트로페, 두 조각배, 1984

또 다른 네모들의 만남

얼마 전 베르나르 뷔페(1928-1999) 작품 감상 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다. ‘생트로페, 두 조각배, 1984’ 그림을 보자마자 다정한 원앙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베르나르 뷔페와 아나벨 뷔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우리의 사랑은 생트로페에서 태어났다.

내가 왜 나무와 배 돛대를 사랑하는지 알겠다.

                                                                                                   아나벨 뷔페_전시 도록 중



잠시 후에는 잔잔한 바다 위에 있는 두 조각 배가 너와 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이 그림 한 장에 우리를 떠올린 것이다. 그림 속에 사랑의 마법이 뿌려져있었던 것일까?

 

김환기의 긴네모 두 개가 만나서 하나의 우주가 된 것처럼,

베르나르 뷔페의 조각배 두 척이 만나서 생트로페 바다를 꽉 채운 것처럼,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만의 우주를 만드는 건 아닐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 나는 잠시 우리들의 작은 우주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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