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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Sep 20. 2023

여행의 이유

처음부터 반반이었다. 명분! 명분이 중요했기에 남편한텐 우리 아이에게 여행의 기쁨을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큰소리를 쳤었지만 이번 여행은 일과 육아에 지친 나에게 주는 짧지만 알찬 휴식시간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정말 절실한 휴식이었기에 어떤 핑계든 필요했다.


10년 동안의 승무원 생활을 뒤로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임신이었다. 처음엔 육아휴직을 하다가 아이가 크면 복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니까. 결국 복직은 하지 못했다. 그 대신 임신을 준비하며 따 놓은 어린이집 원장 자격증으로 어린이집을 차려 선생님들과 같이 아이를 키웠다.


정말 원하던 아이였으나 여행이 너무 그리웠다. 아이가 6개월이 되어 앉을 수 있게 되자 나는 아이를 들쳐 안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여권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아이 여권을 만들고 나서 실제 여행을 하기까진 1년이 걸렸다.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어느 정도 걷고 뛰는 것이 자유로워지자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나의 집요한 설득에 남편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린이집 방학에 맞춰 말레이시아의 코타 키나발루로 향했다.


춥고 건조한 기내 공기에 감기 들까 봐 긴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아기 요람을 신청하여 눕혔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방글방글 웃으며 다섯 시간이 넘는 첫 비행을 잘 보냈다. 따로 신청한 아기 이유식도 싹싹 비웠다. 승무원들이 돌아가며 들여다보고 울지도 않고 잠도 잘 잔다고 귀여워해 주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얕은 수영장과 깊은 수영장을 번갈아 가며 하루 종일 드나들고 썬 베드에서 낮잠을 자다가 풀 바(수영장 안에 있는 Bar)에서 시원한 주스를 마셨다. 밤에는 야시장을 갔는데 첫날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야시장에 가서 별로 재미가 없었지만 다음날 택시 아저씨께 물어 현지인들이 모이는 진짜 야시장에 갔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사마귀 격투게임, 그림자 인형극, 즉석에서 짜주는 사탕수수 즙 기계 등 신기한 볼거리가 많아 재미있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 순간을 즐겼다. 고맙게도 무사히 첫 여행을 다녀왔다.

그렇게 여행의 물꼬를 트고 나니 남편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1년에 한 번씩 가족여행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린이집을 접었다. 그  후부터 아이의 방학에 맞춰 매년 해외의 한 도시를 정해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처음엔 내가 모든 계획을 짜고 예약도 했지만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같이 계획을 짰다. 인터넷으로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보고 동선을 짜고 방문하기 원하는 명소의 입장권도 같이 예매를 했다. 아이와 내가 원하는 곳이 다르면 아빠와 아이가 한 팀이 되어 움직이고 그 시간에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방콕, 세부, 싱가포르, 런던, 파리와 로마, 그 밖의 여러 도시에서 우리 가족은 1년에 한 달씩 이상한 모험을 했다. 길을 잃기도 하고 모든 일정과 예약 서류가 저장된 휴대폰도 분실하였었으며(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후로는 반드시 클리어 파일에 여러 서류와 여권 복사본, 증명사진을 넣어간다.) 갑자기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우연히 만난 유학생 커플에게 밥을 살 테니 한국 식당에 같이 가자고 한 적도 있었다. 외국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일본어로 말을 거는 것이 불편하였었는데 어느새 우리나라의 문화가 세계로 퍼져 아이가 중3 때 갔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BTS를 외쳐주어서 자랑스러웠다.


파리의 개선문에서 군인의 날 행사를 보고 많이 신난 아이

여행을 통해 우리 가족은 좀 더 찐해졌다. 평소엔 맹숭맹숭 지내다가도 위기 상황이 오면 찐하게 서로를 챙긴다. 위기 상황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남편이 어차피 해결될 일이라 느긋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면 나는 빠른 해결을 요하는 조급한 편이었는데 조금씩 서로의 영향을 받아 남편은 좀 더 적극적이 되고 오히려 내가 느긋해지고 있다. 아이는 외국의 문화와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박물관에서 본 각국의 무기에 관심이 많아 무기의 역사에 관한 책을 수집하고 있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싶다. 가족의 찐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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