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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Sep 21. 2023

당신의 인생을 술술 풀어드립니다.

발가락이 부러져 다리를 못 움직이니 하릴없는 시간을 뜨개질로 보내고 있다. 전에 사두었던 빨간색 캐시미어 실로 모자를 떴다. 뒷부분에 리본을 달아보니 제법 예뻤다. 시작한 김에 핸드워머도 완성했다. 겨울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전화를 받거나 음악을 들을 때 손가락 부분이 노출되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좋다. 손목에 레이스도 떠서 달아주었다. 지금은 같은 실로 스카프를 뜨고 있다.


뜨개질은 참 좋은 취미다. 한두 개의 뜨개바늘과 실만 있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가방, 모자, 스카프 등 실용적인 쓸모가 있는 소품을 만드는데 좋다. 사용하다가 싫증 난 소품은 실을 풀어 사각형 조각으로 모티브를 떠서 이어 붙여 담요를 만들 수 있다. 뜨는 동안 잡념도 없어지고 시간도 잘 간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완성한 ‘작품’을 보며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낯을 무척이나 가리는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처음 본 타인에게 이야기를 먼저 건네는 경우가 있다. 길 가다가 또는 지하철에서 예쁘게 뜬 손뜨개 작품을 만났을 때이다. “이거 무슨 실로 뜨셨어요? 도안은 어디서 보셨어요?” 하고 물어본다. 놀랍게도 질문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기분 좋게 웃으면서 실의 종류와 도안을 받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실 구매처, 언제 떴는지, 뜨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선물을 받았다면 언제 받았는지 받았을 때 기분은 어땠는지 TMI(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 지나치게 많이 알려주는 정보)가 풍성하다. 나도 내가 들고 있는 손뜨개 가방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 손뜨개에 관한 한 내가 풀어내는 TMI도 만만치 않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손뜨개가 인간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필멸의 인간에게 복도 주고 화도 주는” 운명의 여신 세 자매 중 클로토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고,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실을 가위로 잘라 삶을 거두는 역할을 담당한다. 세 명의 여신이 실로 사람들의 운명을 엮어낸다. 또한 뜨개질은 힘이 있다. 여성들은 뜨개질을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안데르센 동화 [백조 왕자]에서 마녀는 11명의 오빠를 백조로 만들어 버리고, 공주를 시골로 쫓아낸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공주가 가시덤불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뜨개질을 하여 백조로 변한 왕자들의 옷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공주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11명 왕자들의 옷을 완성하여 저주를 풀어낸다.


어릴 적 9월이 되면 여름 옷을 옷장 깊숙이 넣고 겨울옷을 탈탈 털어 햇볕에 널었다. 엄마가 손으로 짜 주신 손뜨개 바지와 스웨터도 꺼내어 입어봤다. 작년과 비교해서 얼마나 자랐나 보고 옷 치수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여분의 실로 소매길이와 바지길이를 더 길게 이어 붙여 떠 주셨다. 같은 실이 더 이상 없으면 몽땅 풀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 주둥이에서 나오는 김에 풀어낸 실을 지나가게 해서 꼬불꼬불해진 실을 곧게 폈다. 엄마는 그 실로 모자나 장갑을 떠 주셨다. 낡아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 조각조각 잘라서 재봉틀로 알록달록 넓게 이어 붙여 우리 강아지 집에 폭신하게 깔아 주셨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실이 어지럽게 꼬여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꼬인 실들을 풀어보겠다고 이리저리 당기면 묶여버리고 그렇다고 자르자니 아까운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제품도 나와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그 제품의 광고 문구가 걸작이다. “인생은 몰라도 실은 잘 풀어드려요.”. 어디 인생도 이렇게 잘 풀어주는 제품은 없을까? “당신의 인생을 엉킴 없이 부드럽게 술술 풀어드립니다!” 있다면 자식을 가진 엄마로서 내가 제1번 고객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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