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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Oct 03. 2023

백지공포가 찾아왔다

백지공포를 아는가?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하얀 종이를 마주하면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하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증상을 말한다. 흰 종이를 자주 마주하는 화가에게도 이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는데 심하면 몇 년씩 계속되기도 한다니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얼마 전 나에게도 백지공포가 찾아왔었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는 작가로 뽑히고 그동안 써놨던 글을 스토리에 올렸다. 다음날 아침, 스마트폰을 보니 밤새 낯선 이들이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달아주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로 가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굴러 떨어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실제 세계에서 존재하는 나와 브런치스토리에서 존재하는 나, 김제니가 서로 분리된 느낌이 들어 신기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을 읽듯, 난 김제니가 올린 글을 한 편씩 읽어 보았다. 그때까지 쓴 글이 총합해서 12편밖에 없는 얼치기 작가인 나는 가족들이 먹을 아침을 차려야 한다는 나의 의무를 잊고 한참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하! 구독자도 12명이나 된다고! 같이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학우들뿐이지만, 이제 시작이니 구독자가 120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이 기세라면 조만간 책도 내겠는데?’ “엄마, 오늘 아침은 뭐야?” 조금씩 늘어나는 ‘좋아요’ 수를 세다가 아이가 씻고 나와 물어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아침을 차렸다. ‘엄마가 바빠지면 우리 아이는 어디서 아침을 얻어먹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집필과 강의에 정신없이 바빠지더라도 엄마로서의 역할도 확실하게 해야지.’ 하는 다짐도 가슴에 새겨가며 정신없이 아침을 차려 먹이고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글쓰기 지도 강사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글쓰기 카페 친구들로부터 축하인사도 받았다. 아들과 신랑에게 축하해 달라고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해서 케이크에 촛불도 켜고 와인도 마셨다. ‘이제 새로운 글만 부지런히 써서 올리면 되는 거야. 엄마와 아내로서 살아봤으니 이제 작가로서 사는 인생을 여는 거야. 이게 바로 인생 제2막 아니겠어? 구독자들도, 구독자가 될 사람들도 모두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글을 쓰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 10시가 되었다. 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유튜브로 오늘의 뉴스 방송을 보고 난 뒤 음악을 틀었다. ‘오늘의 이슈도 알았겠다, 트렌드에 맞는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거야.’하고 생각하며 한글 프로그램을 켰다. 의미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오늘의 뉴스방송에서 본 사건 내용도 써보았다가 지웠다. 걱정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이야기가 완성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새벽 한 시까지 어떻게든 써보려고 기를 썼는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다음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니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매일 한편씩 쓰다 보니 좀 지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밤에 쓸 수가 없었으니 그럼 환한 낮에 써볼까?’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글 프로그램의 하얀 화면을 마주하니 또다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 이야기도 쓸 수가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무서워졌다. 글 쓰는 시간으로 정해놨었던 밤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었다. 글을 쓸 수가 없어 그 시간에 집에 굴러다니던 털실로 목도리를 짜기 시작했다.


목도리가 완성되어 갈 때쯤 도서관에서 에세이 특강을 들었다. 질의응답시간에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쓸 수 없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강사님은 “백지공포를 겪고 있군요.” 하고 나의 증상을 진단해 주시고 많은 작가들이 겪고 있는 증상이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나만을 위한 글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나만 읽는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덧붙여 “브런치 스토리가 별거냐?”하고 배포 좋게 생각하면서 브런치와 밀당을 하라고 제안해 주셨다. 눈앞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리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속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얕은 내 밑천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내가!’


강의가 끝난 후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 맞아. 브런치가 별거냐?” 난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만 읽을 글을 몇 편 쓰고 나니 내 안에서 글쓰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백지공포를 극복하고 새로 써서 브런치에 올린 글은 조회수가 1만 8천이 넘어 초보작가인 나를 놀라게 했다.


아직 서툴지만 재미있고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다. 왜냐하면 50년을 살면서도 몰랐던 내 안에 있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백지공포는 또다시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젠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글을 쓸 때는 오롯이 나를 위한 글을 쓸 것! 나에게 충실한 글을 쓸 것! 그렇게 되뇌며 나는 오늘도 꾸준히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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