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명란 연어 알리오 올리오!”
“자기야, 난 잔치국수 먹을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준비해줄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우리 집 식사시간의 모습이다. 우리 집에선 식사 때마다 아들과 신랑이 각자 원하는 메뉴를 고를 수 있다. 메뉴의 폭은 다양하다. 동남아식, 미국식, 멕시코와 스페인, 프랑스와 러시아 요리까지 다양하게 주문할 수 있다. 조리법은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다 나와 있다. 주말엔 메뉴를 고르기 위해 가끔 지도를 펴 놓고 가위 바위 보를 한다. 이긴 사람이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짚은 나라 음식을 검색해서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럴 때 바다를 짚게 되면 무조건 해산물 요리를 먹는다. 냉장고 자석칠판에는 각자 원하는 희망 음식을 적는다. 칠판을 보고 장보기 리스트를 작성해서 장을 본다. 자주 쓰는 코코넛 밀크나 파스타 종류는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요리하기가 원래 좋았다. 물, 불, 기름과 소금이 재료와 만나 환상적인 맛을 창조하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요리책이라고는 엄마가 혼수품으로 가져오신 <가정요리백과>밖에 없었던 국민학교 시절, TV에서 본 애플파이의 맛이 궁금했다. 우선 사과를 잘게 잘라 쨈을 만들었다. 설탕과 소다를 넣어 반죽해서 프라이팬에 구운 계란빵 위에 사과쨈을 두껍게 발랐다. TV에서 본 모양과 얼추 비슷하도록 얇게 한 장 더 구운 계란빵을 길게 잘라 십자 모양으로 얹어 예쁘게 꾸몄다. 부엌을 어지럽혔다고 꾸중하셨지만 부모님께선 내가 만든 얼치기 애플파이를 맥심커피와 함께 맛나게 드셨다. “우리 딸 손맛은 당신 내림했나 봐.” 아버지의 총평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종종 엄마의 부엌에서 놀았다. 엄마는 나를 한 옆에 앉히고 요리를 하셨다. “꽃게 손질할 건데 저~어기에 앉아서 봐, 물 다 튈라.”, “고구마 순 껍질 깔 수 있겠어?”, “어? 우리 딸 잘 하네? 이렇게 하면 고구마 순 목걸이도 만들 수 있지, 해볼래?”
엄마의 부엌에서 마술처럼 펼쳐지던 색깔과 냄새의 진수성찬. 엄마는 김장할 때 꼭 멸치 진 젓을 달여서 고운 베에 걸러서 쓰셨다. 멸치젓 달이는 냄새에 내가 코를 싸쥐면 엄마는“이렇게 해야 김장김치가 군내도 나지 않고 맛이 깔끔하게 익는다니까.” 하셨다. 생태 살과 낙지를 꾹꾹 박아 잣과 실고추를 뿌린 보쌈김치는 모양이 꽃핀 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 저녁상에만 오르는 귀한 몸이었다. 오미자청이며 오디청, 매실청을 철에 맞춰 담그시고 식혜를 걸러 조청도 만드셨다. 여름엔 얼음 가게에서 사 온 얼음을 갈아 우유와 조린 팥을 얹어 빙수를 만들어 주셨다. 겨울엔 연탄난로에 석쇠를 얹고 가래떡을 구워 군밤과 함께 조청에 찍어 먹으라 하셨다. 군고구마를 으깨 콩가루와 삶은 팥, 조청을 넣어 동그랗게 빚은 것도 자주 만들어 주신 간식이었다.
엄마가 된 후 내 아이를 위해 엄마표 식사를 챙기는 것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람찼다. 간장, 된장, 고추장도 직접 만들고 시판 소스도 멀리 하면서 빵도 만들어 먹였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아이가 커가면서 심각하던 식품 알레르기가 한 가지씩 사라졌다. 아이가 다 큰 지금도 난 여전히 요리가 좋다. 여러 나라의 음식을 알아보고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지만 어릴 때 눈으로 보고 맛으로 익힌 엄마의 요리를 한 가지씩 다시 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간장게장, 왕만두, 돌솥비빔밥, 애호박편수, 식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기에도 그만이다.
“내가 요리사랑 사네. 허허허.” “난 우리 집에서 먹는 게 외식하는 것보다 더 좋아, 엄마.” 식구들의 이런 얘기들은 내가 하는 수고에 대한 감사이겠지. 하지만 그런 소리들을 안 들어도 난 여전히 요리할 거고 요리를 사랑할 것이다. 요리는 나에겐 엄마와 추억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부엌에 있을 때의 나는 반짝반짝 빛난다.
“오늘은 오디청을 발사믹 식초랑 조려서 스테이크 소스를 만들어볼까?”하고 부엌에 서서 혼잣말을 하니 남편이 “오오, 그거 맛있겠다. 양송이도 볶아서 먹자.”라고 한다. 아들도 신이 난 목소리로“나도 스테이크랑 소스랑 양송이랑 같이 줘.”한다. 내 작은 수고에도 이렇게 호응이 좋다니. 가성비 짱인데? 좋아, 삶은 계란을 넣은 시저드레싱도 만들어 샐러드에 얹어야겠다. 내일 아침엔 청국장 끓이고, 열무김치도 다 먹었으니 또 담가야지. 머릿속이 바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