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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Aug 24. 2024

나는 몸치 음치가 아닌 ‘문치’

하나

  몸의 움직임이 둔탁한 사람을 ‘몸치’라고 하고 음의 높낮이가 부정확한 사람을 ‘음치’라고 한다. 우리같이 난독증이 있는 사람도 이들처럼 글자 보기가 서투른 ‘문치’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전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싸늘하고 냉소적이다.


난독증(dyslexia)의 어원은 ‘dys(서툰) + lexia(읽기)’로 된 그리스어다. 음소의 나눔이 서툰 사람들은 음운 인식의 구별이 안 된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은 ‘곰’이라는 말을 들으면 ㄱ,ㅗ,ㅁ 3개의 음소를 기반으로 글자를 음성으로 바꿔 그 의미를 떠올린다. 그런데 난독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음소 구분이 어렵다. 이를 ‘음운론적 취약성’이라 하는데, 정보처리 과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체 인구의 5~10%가 난독증을 앓고 있으며 일란성쌍생아의 경우 둘 모두의 경우는 70%이다. 가족력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신경 체계의 문제라는 연구 결과다.      


나는 50살이 넘어서야 내게 ‘난독증’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영화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스티븐 스필버그도 60세가 되어서야 “내 삶에 미스터리가 이제야 풀렸다”라며 자신의 난독증을 토로했다. 난독증은 본인도, 가족도, 교사도 원인을 모른 채 지나갈 수 있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종종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전략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적응 전략은 난독증의 징후를 감출 수 있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사람들의 무지, 인식 부족과 시설과 교육의 누락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증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 단어, 한 문장과의 싸움은 끝없는 전투와 같았다. 하지만 글자들과의 싸움에서 매번 패배했고 그 패배감은 무력감과 상실감으로 이어졌다. 글자들은 나를 비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조롱하듯 춤을 추었다. 왜 글자들이 나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고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 지쳐만 갔다.

책을 보며 친구들은 웃고 즐거워할 때 나는 그 웃음소리에 섞이지 못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쓸 때면 낱말들은 쓰나미가 되어 나를 덮쳤고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나는 글자들에 의해 밀려났다. 허우적대는 문장들을 구해보려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봤지만, 낱말들은 흩날리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활자들은 길을 찾지 못해 미로 속에서 방황했다. 나의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나의 힘듦을 알아달라고, 도와달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나의 외침은 그저 무력한 한 아이의 투정에 불과했다.

나도 다른 형제들처럼 부모에게 사랑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런 나에게 공부하기 싫어서 딴전 피운다며 야단을 쳤다. 저항감은 때때로 자생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꿈의 자산이 되기도 한다. 존재에 대한 나의 열망은 저 너머의 세계를 갈망하고 또 갈구했다.      



나는 삼 남매 중 둘째다. 공부를 월등하게 잘하는 오빠는 처음부터 상대할 수 없는 적이자 벽이었다. 여동생은 순종적이고 착하고 어렸기 때문에 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적이었다. 부모에게 있어 나의 존재는 아픈 손가락일까? 미운 오리 새끼일까? 옥에 티일까? 부모의 기대와 나의 능력은 상충했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유토피아에 오빠와 동생은 무사히 안착했지만, 난 행성 주변을 떠돌며 방황했다. 엄마는 나를 포기할 수 없어 밧줄을 던져주었다. 그것이 ‘플루트’다. 음악을 하면 대학은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악보의 음표들 역시도 나를 조롱했다. 음표들은 전선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현란하게 꼬리를 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쫓아가다가 길을 잃고 또 잃고를 반복했다. 이런 긴장감은 자꾸만 건강에 신호를 보내며 나를 아프게 했다. 공부도 음악도,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한없이 멀고 복잡하고 험난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그날따라 성적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고개를 숙이니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나를 뺀 사람들의 발걸음은 모두 경쾌해 보였다. 그때 결심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돼! 엄마 아빠도 공부 잘하는 자식들이랑만 살면 더 좋을 거야.’

우리 집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 매달렸다. 그런데 죽으려고 하니까 진짜로 죽을까 봐 무서웠다. 있는 힘껏 팔에 힘을 주고는 바둥대는 다리를 끌어올렸다. 다리는 상처투성이 되었지만 살아있음에 마음이 놓였다. 성적표를 부모에게 보일 수 없어 아빠 도장을 훔쳐다가 확인 도장을 찍고는 학교에 제출했다. 며칠 후 아빠는 도장을 내 서랍에서 찾아냈다. 권위적인 아빠였기에 늘 무서웠는데 그날은 더 끔찍했다. 대나무 총채가 부러질 정도로 종아리를 맞았다. 회초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송골송골 피가 맺혔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도 난 울음을 참아야 했다.


내게도 특별한 경험은 있다. 과외선생님 댁에서 8명 정도 지도를 받았는데 한 번은 선생님이 내준 문제를 다 풀어야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30분 정도 걸려 다 풀고 집에 갔는데 나는 2시간이 넘고 3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채점했다. 친구들은 여러 문제를 틀렸는데 나만 백 점을 맞았다. 놀라웠다. 내가 공부를 제일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성적이 제일 나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난 잘할 수 있는 아이였다. 그때의 기쁨과 벅차오름은 사진을 찍듯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내내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3학년 때는 새로 부임한 남자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몸은 마르고 눈매는 날카롭고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있었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 음악부를 맡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밴드부를 만들었고 반 아이들에게 입단하기를 권했다. 엄마는 반가워하며 내게 플루트를 하라고 했다. 처음으로 플루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다. 공부도 어렵고 밴드부도 힘들었지만,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쉽지 않았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들어오는데, 같은 반 아이가 친구들 보고 할 말이 있다며 복도 끝으로 데리고 갔다.

“00 엄마가 찾아와 선생님께 돈을 주는 것을 봤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심코 흘려버렸지만, 소문은 금세 쫙 퍼졌고 담임 귀에도 들어갔다. 선생님은 엄청 화를 내며 소문을 낸 아이들을 색출해 나갔다. 5명 정도 불러냈는데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없어 보였다. 담임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다짜고짜 칠판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볼은 얼얼했고 머리는 흔들렸고 몸은 휘청였다. 난 영문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내야 했다. 반성이라도 할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글자가 그러하듯, 음표가 그러하듯, 어른들은 이유를 주지 않았다. 그저 난 당해야 했다. 그 후로 담임의 얼굴을 보며 수업을 받는 것도 고통스러웠고 밴드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에게 글자와 플루트는 위협적인 흉기와도 같았고, 알 수 없는 죄책감만 켜켜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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