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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Sep 22. 2023

의자

  의자는 시작하기에 좋은 사물이다. 회의나 독서토론은 의자에 앉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사실상 의자를 잠깐 사는 것이다. 또 의자는 훌륭한 첫 대상이 된다. 미술 수업에서 의자를 그리거나 소설 창작 수업에서 의자를 주제로 글을 써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너무 기쁜 사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버리고 슬픈 사람은 의자에 털썩 앉는다.

  김성용 시인은 시 『의자』에서 의자가 흉측한 짐승이며 먹이가 앉기만 기다린다고 썼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드는 법이 없다고 썼다. 김해성은 건방진 의자야! 외치며 의자를 발로 찼다.

  김해성은 후회하는 생물이다. 의자를 일으켜 세워 단정히 놓았다. “미안하다. 착한 의자야, 착하지.” 말하며 의자를 쓰다듬는다. 의자는 아무 반응도 없다. 의자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별의별 꼴을 다 봤다. 의자의 아버지는 자꾸 자기를 밟고 올라서는 인간들을 참았다. 의자의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개에게 물려 큰 흉터가 남았다. 의자들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의자에 올라간 인간은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어떤 의자는 아슬아슬한 묘기에 사용되어 전 세계를 떠돌았다. 레슬러들은 접이식 의자를 접어 다른 레슬러를 내려치는 일에 사용했다. 의자는 모든 의자의 역사를 빠짐없이 들었다. 의자는 당황하는 법이 없다. 의자는 침착하게 말한다.

  “모든 의자는 기본적으로 침착한 심성을 타고나요. 그렇지 않은 의자는 앉을 수가 없어요. 시끄러운 콘서트장에서 당신 머리 위로 올라 당신보다 신난 의자를 상상해 보세요. 그런 의자는 사는 의미를 잃어버려요. 의자는 앉은 대상의 온기를 먹고 살아요. 앉아야 할 때 앉을 수 없는 의자는 신뢰를 잃어요. 그런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요.”

  김해성은 대답한다. “그렇다면 모든 게 괜찮아진 거구나. 의자야 너는 어떤 순간에도 나를 거부하는 법이 없었지. 고맙다 의자야.”

  의자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김해성이 앉기를 기다린다. 김해성이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자, 의자는 말한다.

  “의자와 인간은 서로가 필요해요. 그래서 어느 한쪽이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의자를 만들고 의자에 앉은 인간이 또 다른 의자를 만들어요. 의자를 만들지 않아도 결국 의자로 흘러요. 세상을 저버린 인간들도 결국 자리에 앉는 법이랍니다.”

  김해성은 짐짓 놀란다. 의자처럼 안 생긴 의자도 다 의자로 받아들여 주는 건가, 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의자의 계획대로였고 이 사실을 공공연히 떠드는 일도 의자의 계획이다. 의자의 말처럼 앉을 수 있으면 의자가 된다. 의자는 일종의 개념이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다. 이들은 하나의 믿음으로 움직인다. ‘앉을 수 있는 건 다 의자다’ 의자들은 애초에 계획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김해성은 끔찍한 공포에 빠졌다. 얼마 전 김해성의 조카가 김해성의 무릎에 앉은 사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의자는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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