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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Oct 24. 2023

러브크래프트를 탈덕하며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신화의 뿌리가 된 작품을 남긴 소설가다. ‘크툴루 신화’에서 크툴루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을 썼으니 더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다. 편지를 유난히 많이 썼고,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가 죽자, 세계관에 살을 붙이고 일종의 신화 체계를 만든 것은 어거스트 덜레스였다. 크툴루 신화는 후대의 많은 예술가와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줬고 우주적 공포를 담은 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이후 크툴루 신화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팬덤이 구축되었고 이들을 ‘러브크래프티안’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랬었는데, 이젠 다른 길이 보인다.

  우주적 공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포의 크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약간 다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입문에 추천되는 『벽 속의 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짧게 줄이면 쥐가 있는 것 같아서 벽을 열었더니 무시무시한 진실과 마주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진실이 뭔데? 얼마나 무시무시한데? 같은 질문을 한다. 핵심은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진실에 있다. 예를 들면 지하실에 여태 몰랐던 문이 있어서 열었더니 긴 동굴이 이어졌고 거대한 천연동굴의 내부로 들어서자, 사당이 있고 인신공양을 했다는 흔적이 역력하고 촛불이 밝혀져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방에서 몰래카메라를 발견하고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해 보니 당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 있더라는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불가해한 것이다. 크툴루 신화에 의하면 우주적 진실에 근접할수록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도대체 그건 뭐였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남긴 채 너무 거대하게 늘어난 인식 때문에 남은 삶이 피폐해진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단순하게 무지막지하게 큰 문어 머리 괴생명체라든지. 그런데 그 생물이 인간보다 우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먼 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현실과의 괴리감이 들게 한다거나 인간보다 오래된 일종의 문명 흔적을 발견하는 이야기라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심해 공포증이라든지. 단순히 행성들의 사진을 볼 때 느끼는 막막함 또한 우주적 공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실(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에 가면 네이버에 크립티드를 검색하거나 미스터리 관련 웹사이트 ‘괴물딴지’에 접속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안 그런가 하면 지금도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마음껏 검색한다. 미스터리는 삶을 복기하게 한다. 네스호의 괴물 네시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너무 슬퍼서 가슴이 답답했다. 사춘기였다. 앞자리에 앉은 애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친구가 있었다. 졸업이었다. 미스터리 마니아였던 내가 러브크래프트 작품을 탐독한 것도 크툴루 신화 정리 글을 읽으면서 밤을 보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러브크래프티안을 그만둔다고 해서 일종의 환멸을 느꼈다거나 더 나은 이야기를 찾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만하면 그만 파도 되겠다고 끄덕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인부다. 부정형의 악신이나 촉수 달린 괴물이 이제 친근하다. 크툴루 신화는 이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파멸의 예언서 네크로노미콘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악신들은 정체를 드러냈다. 이제 희미한 길을 따라 다시 떠날 때다. 크툴루가 포켓몬 같다고 할까.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지구를 내려보는 인공위성 같다. 건강하게 잘 지내렴 크툴루야!

  컴퓨터실의 정보 선생님은 이제 곧 정보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말했던 것 같고 선생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크립티드 문서를 보면 첨부된 사진은 화질이 나쁘거나 삽화다. 그건 절대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잘 짜인 거짓말이다. 민간 신앙이다. 더 살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계속 사는 인간과 계속 태어나는 인간. 사이버 공간의 진심 같은 대책 없는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미스터리가 계속 풀리고 계속 생기는 와중에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다. 서부영화 『셰인』의 한 장면처럼 황야로 사라지고 싶다. 와중에 누가 돌아와요!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나는 탈덕한다. 주머니에는 예티, 모스맨, 추파카브라, 수수께끼의 인체 발화 현상 같은 골동품이 가득하다. 딱히 신선한 미스터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만큼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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