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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Jan 25. 2024

미스터리 비디오

  대학의 소설 창작 강의였다. 내가 쓴 소설을 합평 받고 있었다. “인마, 요즘 세상에 비디오 대여점이 어디 있느냐?” 교수님은 말했다. 내 소설 속에 지나가듯 비디오 대여점이 나온 것이다. 저희 집 앞에는 있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언급이나 소재, 장치가 없으면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바로 지금으로 본다. 그런 것을 배우고 있었다. 비디오 덕분이었다.

  비디오가 멸종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저희 집 앞에는 있다니까요? 대답이 무색하게 계절이 바뀌자, 비디오 대여점은 폐업했다. 간판은 비디오 대여점 그대로였지만, 비디오 대여 사업은 오래전에 접었고 만화책 대여를 계속했던 것 같다. 비디오들이 증거물처럼 박스에 담겨 매장 밖에 쌓여있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비디오가 오늘 아침 체포되었습니다.

  나는 비디오에 빚진 게 많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 티브이 채널이 열 개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집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티브이는 정규 방송 밖에 안 나왔다. 볼만한 건 『전설의 고향』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케이블 채널이 보급된 건 몇 년 뒤의 일이었으므로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봐야 했다.

  동네 대여점 주인은 딱히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명백히 십오 세가 아닌데도 영상물 등급 제도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폭력은 나를 영악하고 조숙한 아이로 자라게 했다. 부조리의 유쾌한 면을 알아내고 조금 음침하게 웃는 아이로 만들었다.

  어떤 날은 공포 애니메이션을 보고 완전히 겁에 질렸다. 파격적인 영상이었다. 『전설의 고향』이 시시해진 건 이때쯤이었다. 애니메이션은 단편을 모아놓은 옴니버스식 구성이었다. 세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셋은 각각 다른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남자가 라이터를 켜자, 폐소공포증을 가진 남자가 공기가 사라지니 그만하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옥신각신하다가 남자들은 엘리베이터 천장을 열고 탈출하기로 한다. 다른 남자를 끌어올려 주던 남자가 손을 놓아버린다. 먼지를 무서워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떨어진 사람은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부분에서 뭔가 비장한 내레이션이 깔렸던 것 같다. 정말 무서운 건 인간이 아닐까요? 하고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대부분의 비디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봤다. 시리즈 넘버링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나는 오로지 이미지만 봤다. 나는 이십 세기 이미지 수집가였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웠다고 비디오가 시작될 때 나온다. 어? 저는 지금도 셋 다 무서운데요……. 나는 비행 청소년도 비행 어른도 못 되고 말았다. 강렬한 이미지의 연속이 비디오였다. 그 많은 부적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미적 세계를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 스쳐 지나는 곳이 비디오 대여점인가 보다. 이 정도가 왜 비디오 대여점이 나오고 말았는지에 대한 늦은 변명이다. 대여점 앞에 쌓여있던 비디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많은 비디오를 봤지만, 어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다. 비디오를 본 적 없는 것처럼. 어린 나의 환영도 뜻 모르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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