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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Mar 27. 2024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좀 무섭다

영화 큐어의 스포일러가 있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좀 무섭다. 내가 잔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벌레를 붙잡아서 변기에 버렸다. 그때까지도 벌레는 변기의 미끄러운 세라믹 벽을 붙잡으려 원을 돌았다. 물을 내리면 더 큰 원이 흐름을 그린다. 더는 뭘 어쩌지 못하는 벌레가 사라진다. 변기 가까운 곳엔 늘 거울이 있고 나는 거울을 본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서 있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도무지 믿기 힘들다. 사람이, 사람이 저쪽에서 막 온다는 건 실은 좀 무섭다. 때때로 많이.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보고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떠오른 것은 무섭기 때문이었다. 기괴한 영상미, 뚝뚝 끊어지지만 떨쳐내지 못하고 이어지는 악몽 같은 이야기. 범인은 자꾸 “넌 누구야?”하고 묻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의사 김해성입니다. 형사 김해성입니다. 김해성입니다. 저는 아직 학생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범인은 계속 묻는다. 넌 누구냐고. 진짜 나를 보여줄까? 자신만만 하지만 누구도 진짜 나를 보여주는 건 힘들다. 그걸 노린 질문이 아닐 것 같아서이다. 결국, 나랑 하고 싶은 게 뭐에요? 묻게 되고 범인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을 것이다.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 압도되는 것은 당연하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와 함께 오고 있음을 감지하는 상황과 닮아있다. 놀라움과 공포는 일란성 쌍둥이다.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건 요컨대 그렇다. 정신과 의사는 아무리 최면 암시라도 근본적인 도덕관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에는 작은 불빛을 내는 라이터가 나온다. 담배에 가져다 대면 불이 붙는다. 물컵에 담긴 물처럼 살짝 건드려 엎지르면 어떤 법칙에 따라 바닥을 흐르게 된다. 그러니까 살의라는 건 크게 부풀리면 부풀려진다. 아니, 그전에 다들 조금씩은 죽이고 싶구나.

  가끔 뉴스에서 사이비 범죄 집단의 아지트가 공개되면 도대체 어디에 저런 장소가 있었던 걸까? 생각하게 된다. 저 작은 방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무대가 사이버 공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말 거대한 가상의 회관이 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충분히 폐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의 세계에 짓는다면 어떨까. 정신에서 정신으로 옮겨가는 병이 창궐한다면 막을 수는 있는 걸까. 그런 가정법이 무섭고 그것이 어쩌면 약간은 현실의 공기 중에 떠도는 것 같다.

  영화에 나온 폐허가 된 정신병동.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과 정신을 옮겨 다니면 그렇게 낡게 될까. 어쩌면 그 병동은 주인공의 내면으로 이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아내를 넣고 범인을 넣고 얼굴 없는 최면술사를 넣은 뒤 마음껏 살의를 품는 풍경이 있었던 것 같다. 부디 그 병동을 누군가 불태워버리기를.

  사람이 온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의 모든 날이 함께 걸어오니까. 환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을 안다는 건 막막한 일이 된다. 그의 방에 들어갈 땐 모든 것이 어둡기 마련이다. 이상하게도 주머니엔 라이터밖에 없다. 불빛으로 방을 조금씩 읽어내다 보면 정확히 라이터 불빛만큼만 알게 된다. 흐릿한 불빛으로 본 것을 봤다고 믿으며 다음에 더 알게 되겠지,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에 왔을 땐 방의 구조가 바뀌어 있다. 여전히 방은 어둡고 손에는 작은 라이터뿐이다. 불이 붙지 않게 조심히, 손가락이 타들어 가지 않게 조심히.

  감방처럼 안 생긴 감방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물이 라이터 불빛을 지운다. 범인은 주인공에게 이제 편해질 것이라고 한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사건 브리핑실까지 따라온다. 주인공은 정말 그 방에서 나오긴 한 걸까. 마침내 당도한 어떤 방에는 물이 가득 차 있다. 녹음기를 작동시키면 치료하라는 목소리가 재생된다. 다음으로 주인공은 정말 편한 듯이 밥을 먹고 있다. 아니, 그전에 후배를 때렸다. 범인에게 총을 난사했다. 아내가 죽었다. 주인공의 머릿속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까.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범인이 처음 등장한 곳이 바닷가라는 게 소름 끼치는 점이다.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도망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정신 치료의 한 계단이 인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들 조금씩 어둠을 품는다. 누군가는 어둠이 더 크다. 아내를 두고 가는 주인공에게 던진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제가 보기엔 당신이 제일 환자 같아요.”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희망적인 장면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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