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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pr 17. 2024

게임에 대한 단상 1

  스무 살 무렵까지 책은 거의 읽지 않았다. 대신 게임을 아주 많이 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엔 친구들과 놀이터에 모여 온갖 놀이를 생각했다. 점점 규칙이 추가되며 정교하게 변하는 놀이를 한순간에 질려하면서 수많은 여름을 통과했다.

  컴퓨터가 생기자, 그건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놀이터가 옮겨갔을 뿐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게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건 놀이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형은 나를 자주 피시방에 데려갔지만, 게임을 자세하게 알려주진 않았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시작했던 때가 생각난다. 캐릭터 얼굴과 이름을 정하고 나면 거대한 황야의 전경이 보이는 영상이 나온다. 오렌지빛 하늘을 새의 시선으로 따라가면 내 캐릭터가 보인다. 그건 나다. 새로운 세상에 온 것이다.

  세상은 1레벨 캐릭터에게 그럴듯한 임무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 사과를 열 개 따오라거나, 멘토가 될 NPC에게 말을 걸어보라는 정도의 일이다. 시시하다고? 시시함이 좋았다. 사과만 백 개 정도 따면 안 될까요?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사과를 잘 따는 것 같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친절하구나, 생각을 하게 된다. 온라인 게임은 1레벨 캐릭터를 어린 식물처럼 다룬다. 1레벨 캐릭터가 빳빳하고 얼룩 하나 없는 옷을 입고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한다고 해도 온라인 게임은 그들을 비웃지 않는다. 전사라거나 주술사라거나 사냥꾼 같은 직업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불러준다.

  사람들은 보통 시간이 없어서, 그것이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 채 게임을 그만둔다. 나는 거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즐거움을 찾고자 열정을 쏟는 일 대부분이 그렇다는 걸 굳이 한 번 말하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축구에 진지하게 임해 본 적이 없다. 작은 공 때문에 이 전쟁이 일어난 건가? 하는 생각이 마지못해 수비수로 배치된 나를 끝없이 건드린다. 지지부진한 이야기다. 어떤 취미를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이미 세계다. 하지만 수비수가 경기 중 갑자기 당근 농사를 시작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목적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 세계 축구 규정집에 ‘경기에 열정을 잃은 플레이어가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을 금지함’이라는 규정 또는 그에 준하는 문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온라인 게임은 어떨까. 온라인 게임을 시작한 당신이 “바닥에 전갈이 돌아다니잖아? 멋지군. 전갈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전갈보다 작은 뭔가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임은 그것을 용인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에 서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지켜본다. 이 지켜봄은 재촉이나 걱정을 포함하지 않는 지켜봄이다. 그것이 온라인 게임의 놀라운 점이다.

  설명이 늦었지만 각각의 온라인 게임은 각각 다른 세계에서 작동되므로 이 글에서 칭하는 온라인 게임은 수많은 플레이어가 하나의 세계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MMORPG의 세계에 한정된다. 그러나 모든 게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상태를 하나의 선택지로 두고 있기 때문에 내겐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와 목적 집단으로 어울리는 상황에선 우리의 분방함은 약간씩 희생되어도 좋다.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간단한 임무를 처리하지 못한 나에게 형이 내비친 걱정스러운 기색은 자연스러웠다. 온라인 게임은 레벨 업이나 흔히 말하는 스펙 업이 목적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렇든 저렇든 레벨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사과를 따오라’는 첫 임무에 깃든 친절함이란(앞선 수많은 캐릭터가 사과를 가져다주었음이 명백함에도!) 우주 공간에서 모선과 멀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모선을 향해 등을 살짝 밀어주는 사랑의 구체성이라고 믿는다. 그건 지켜봄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 부드러운 힘을 받아 뭔가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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