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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pr 26. 2024

숲속을 걸어요

  숲속을 걸어요, 하고 시작되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음 가사는 모른다. 그래서 계속 숲속을 걷는다. 정처 없이, 이유도 모르고 걷는다. 걷다가 숨이 차서 나무에 등을 기댈 때까지, 무릎이 아파서 이끼 위에 잠시 앉을 때까지, 걷다가 또 걷다가 이제 완전히 질려버린 나는 숲속을 그만 걸어요, 하고 노래를 불러본다. 그래도 숲은 끝나지 않는다. 계속 걷지 않으면 이 숲은 끝나지 않겠구나, 깨닫는 순간엔 이미 숲속을 걷는 중이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다. 울창한 숲은 어둡다. 땀이 식어서 몸이 아주 차갑다.

  아무래도 노래의 가사 어딘가 산새들이 나왔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건 착각에 불과한 것인가. 산새들이 노래했던가 산새들이 살고 죽고 날다가 뭘 했는지 모르는 채로 숲이 끝나버렸다. 햇살은 아주 따뜻하다. 처음부터 숲에 가지 않은 듯도 하다. 늘어서면서, 계속 늘어지기만 하는 이미지의 연속이 어쩐지 과거엔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산새들은 등장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아직도 노래 가사에서 숲속을 걷다가 산새를 만나는지, 곰을 만나 죽음을 맞는지 모른다. 모른 채로 모든 것을 동시에 진행한다. 질질 끌며, 온몸으로 밀며 앞으로 간다. 앞이라고 믿는 곳으로 간다.

  송도를 걷는다. 송도를 걸어요, 하고 말해본다. 이런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가사를 지어낸다. “송도를 걸어요. 걷다 보니 쇼핑몰이 보이네요.” 그러자 진짜로 눈앞에 쇼핑몰이 나타난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인가. “송도를 걸어요. 걷다 보니 백만 원을 주웠네요.” 둘러봐도 떨어진 돈은 없다. 백만 원을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줘야지. 그래, 그걸 이 노래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라고 하자. 백만 원의 주인은 어딘가에서 가슴을 치며 주저앉아 울고 있을까. 일어나, 백만 원을 찾으러 가야지. 소소한 반전이 끼어든다. 사실 백만 원의 주인은 백만 원이 필요해서 백만 원을 잃어버린 척했다. 그렇다면 백만 원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진실이 끼어든다. 이 방향으로 계속 걸으면 쇼핑몰이 나온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쇼핑몰에 당도하는 것이 놀랍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멀리 보이는 쇼핑몰이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날은 이제 몹시 덥다. 등이 다 젖었다. 마시고 싶다. 마시고 싶어서 원하고, 원하다 보면 슬퍼진다.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재가 믿기지 않는다. 믿을 수 없으므로 계속 걷는다. 쇼핑몰이 가까워지지 않는 건 내가 제자리걸음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백만 원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백만 원이 멀어지는지 보려고 그랬다. 백만 원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쇼핑몰은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곧 물을 마실 수 있다. 얼굴을 씻고 내부를 걷다가 쇼핑몰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수도 있겠지. 그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산새들이 거기 있다. 산새들을 숲에 두고 왔다.

  아, 내 백만 원. 쇼핑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뒤로 걷는다. 쇼핑몰은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다. 걷다 보면 백만 원이 나오겠지. 백만 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백만 원을 잃어버리고 정말 슬퍼진다. 슬프지만, 백만 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척 노래를 불렀다. 숲속을 걸어요, 하고. 그러나 숲도 백만 원도 산새들도 나를 찾아오지 않기에 모든 것을 중단한다. 중단한다는 생각도 중단한다. 이제 어떤 것도 내게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수 없다. 그렇게 해봐도 쇼핑몰이 점점 가까워지는 건 멈출 수 없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잘못된 것을 알아보려고 숲으로 돌아간다. 거기서부터 다시 천천히 찾아볼 것이다. 산새들이 정말 있는지 숲속을 걸어볼 것이다. 숲속을 걸어요, 하고 흥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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