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티세크 쿠프카와 바가바드 기타
쿠프카, <연꽃의 영혼>, 종이에 수채, 38.5x57.7cm, 1898, 국립미술관, 프라하
쿠프카, <생명의 시작>, 종이에 에칭, 34.5x34.9cm, 1900, 퐁피두센터, 파리
하얀 연꽃 위로 눈부시게 밝은 빛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그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아기와 탯줄로 이어진 모태는 황금빛으로 온 연못을 비추며 빛을 발산하고 있다. 물 위를 뒤덮으며 떠 있는 수련의 잎들은 저 멀리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짙은 어둠, 그 적멸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아기의 형상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신비하고 거룩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서구에서 흔히 연꽃의 이미지는 창조와, 여성성, 그리고 성적인 결합과 연관되었으나, 이 그림에서는 연꽃이 생명의 기원,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다.
힌두교엔 다양한 유파가 있어 모든 신화가 일관적으로 서술되지 않지만 많은 힌두 신화에 따르면, 우주의 혼돈 속에 비슈누가 잠들어 있을 때 그의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올라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슈누의 거처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 속의 바이쿤타(Vaikuntha)라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낙원이다. 바이쿤타의 연못에는 홍련, 청련, 그리고 백련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데, 그중 하얀 연꽃 위에 비슈누와 그의 아내인 락슈미가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앉아 있다. 근대 이후 동, 서양의 교역이 활발해지며 동양 종교가 서구 사회에 전해졌고, 회화적 표현이나 비평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연꽃에 대한 동양 종교적인 이미지가 차용되기도 했다. 연꽃과 수련은 엄밀히 다른 식물이지만, 종교, 신화에서 우의적으로 서술되는 연꽃은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개념으로 흔히 쓰인다. 물 위에 떠있는 잎들과 꽃의 형태로 볼 때, 이 그림 속의 연꽃은 수련이다.
이 그림 <생명의 시작 The Beginning of Life>은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šek Kupka, 1871-1957)가 1900년에 제작한 에칭 작품이다. 체코 출신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인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가 있는데, 열한 살 아래인 쿠프카 역시 무하만큼이나 비중 있는 체코 출신 예술가이다.
체코는 쿠프카가 태어난 1871년에는 보헤미아 왕국 동부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국의 패배로 귀결됨에 따라 슬로바키아 지역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였다. 5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빈곤한 집안 살림을 해결하기 위해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말안장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쿠프카는 이 일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생계유지를 위해 정규교육을 그만두게 된 이 상실의 경험으로 인하여 쿠프카는 일평생 철학, 종교, 과학 등 서적의 탐독을 비롯한 여러 방면으로 자기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간판 그리는 일로 약간의 돈을 벌어 가며 보헤미아 지역을 떠돌아다니던 쿠프카는 1889년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1892년에 비엔나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전공인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에서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 일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스스로 습득했으며, 특히 동양의 종교와 신지학(Theosophy)에 몰두하였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엘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러시아, 1831~1891) 또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불교사상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신지학 운동은 종교라기보다는 지와 깨달음에 대한 하나의 태도 혹은 사상체계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미술가로는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고갱이 있으며, 절대주의 미술로 잘 알려진 말레비치가 있다. 쿠프카의 작품 세계 역시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 기인하여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896년 파리에 정착한 쿠프카는 카바레의 포스터를 제작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및 카투니스트, 디자이너 등 여러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빈한한 환경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사회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점차 무정부주의 그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러 사회 풍자적인 카툰, 일러스트로 신문, 출판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야수파, 상징주의, 후기인상파 등 다양한 미술사조를 접하며 실험적 습작을 하던 그는 1909년 미래파 선언을 접하고 영감을 받아 점차 추상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하였다. 흔히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바실리 칸딘스키를 거론하지만, 모든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추상화의 출발점에 프란티세크 쿠프카 혹은 이탈리아의 아르날도 코랄디니(Arnaldo Corraldini, 1890~1982)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여러 분야의 방대한 사상과 지식을 탐색하였고, 현대 미술의 태동기와 격변기에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활동하였던 쿠프카의 작품세계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쿠프카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 제작한 작품들을 보면, 이것을 한 사람이 제작한 그림들이 맞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상이한 화풍의 그림들이 많다.
작가의 이름을 모른 채, <생명의 시작>을 접하는 우리나라 관객은 이것을 아시아 어느 작가의 작품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체코의 화가가 그렸다고는 믿기 어려운 작품이다. <생명의 시작>은 그가 비엔나의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이후, 동양철학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상징적이고 우화적 주제에 집중하며 작업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연화화생(蓮花化生)!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중생이 수명을 다하였을 때 무량수불과 여러 대중이 그 사람 앞에 나타나, 그 부처를 따라 그 나라에 왕생하여 바로 칠보의 연꽃 속에서 저절로 화생 한다"라고 이른다. 연화화생은 삼계(三界)의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벗어나 연꽃을 통해 극락정토에서 왕생하는 기원을 의미한다. 연화화생의 심상은 현재 전해지는 불교 관련 문화재나 고전 문학 작품에 때때로 등장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숙하다. 예를 들어 심청전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은 줄로 알았던 심청이 연꽃 속에서 다시 살아서 나타나는 장면도 연화화생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장천 1호 고분 벽화에서는 '남녀쌍인 연화화생(男女双人 蓮花化生)'으로 불리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남녀 어린아이들이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우리 고대 문화가 가진 예술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 향로에서는 그 당시 동북아시아에 두루 퍼져있던 신선사상의 영향도 관찰되지만, 본질적으로 연화화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불구(佛具)로 인식된다.
쿠프카의 <생명의 시작>에서 읽을 수 있는 연화화생의 이미지는 이보다 2년 앞서 제작된 <연꽃의 영혼 The Soul of the Lotus> 에도 나타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영적인 시야를 제시하기 위해 자연을 재구성한다. 배경은 여전히 연꽃이 가득한 그 연못이지만, <연꽃의 영혼>에서 인물은 완전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반면, <생명의 시작>에서는 태아의 모습으로 묘사하여 오로지 연꽃에서 탄생하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연꽃의 영혼>에서 시작된 창조에 관한 도상과 주제는 <생명의 시작>으로 확장되어 쿠프카의 작품에 반복하여 나타났다. 또한 쿠프카는 <생명의 시작>에서 원의 형태가 지니는 불교적 탄생의 의미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대개 관자재보살의 도상에 등장하는데,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그의 예술가로서 동양 미술에 대한 관심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열망을 이해할 수 있다.
쿠프카가 활동하던 무렵의 파리에서는, 근대 이후 진행된 박물관의 성행과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아시아의 여러 문화적 소산물을 부분적으로나마 직접 접할 수 있었다. 1879년 에밀 기메(Emile Guimet)에 의해서 설립된 기메 미술관(Musée Guimet)은 프랑스 최초로 인도와 동아시아의 유물들을 전문적으로 전시하였다. 쿠프카는 이미 동양 사상을 습득하였으나, 화가로서 작품 제작에 필요한 불교적 도상을 직접 접하기 위해서는 파리의 기메 미술관의 소장품들을 눈여겨봤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기메 컬렉션은 쿠프카뿐만 아니라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마르셀 뒤샹과 같은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이 불교 사상에 심취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 당시 서구사회는 오랜 경제적 번영과 근대 자연과학이 이룩한 성과에 힘입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일종의 지적 낙관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시작인 20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의 양자역학에서 제시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 등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을 새로이 제시했다. 또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 정치적인 격변과 파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막연한 유토피아적인 몽상을 디스토피아적인 악몽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쿠프카는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을 추구하는 비구상미술단체인 ‘추상-창조(Abstraction-Création)’그룹의 창립멤버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특히 그는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추상 작업을 진행하였다. 추상 미술의 흐름에서 혁신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들만큼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쿠프카는 1936년 뉴욕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큐비즘과 추상 미술 회고전에 포함된 바 있었고, 파리 쥐드폼 미술관 (Galerie du Jeu de Paume)에서 무하와 함께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쿠프카가 살던 시대는 혹독한 비극의 시기였다. 인류에게 참혹한 고통을 안겨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전쟁만큼이나 끔찍한 경제 공항이 일상을 덮쳤다. 보다 아름다운 삶을 열망하였을 쿠프카는 <생명의 시작>과 <연꽃의 영혼>으로 대표되는 상징주의시기 이후 시대적 아픔을 겪은 뒤,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현대 추상미술의 근저에는 '자연과 사물의 충실한' 재현을 탈피한 '본질에 대한 순수한 직관'에의 추구가 존재하였고, 표피적인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 알아서 깨닫는 것들보다는 내면세계의 영성과 신비에 대한 모색이 있었다. 쿠프카와 현대 미술의 선구자들에게 불교의 사상은 기존의 타성적인 예술관을 타파하고, 누구도 걸어가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의 길을 보여 주었다. 당대 체코출신 어느 유명 작가의 말처럼, 쿠프카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자’였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
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고통과 기쁨에 동요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람,
어떤 상황에나 만족하며 자신을 제어하고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
...
이런 사람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세상 또한 이런 사람을 흔들지 못한다. “
『바가바드 기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