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은 이들에게 꽃을 주는 이유는
나는 죽은 이에게 꽃을 주는 행위를
오랫동안 하나의 풍습쯤으로 여겼다.
꽃으로 죽은 이를 위로하는 일, 해야 할 일처럼 정해진 순서, 슬픔이 너무 튀어나오지 않게 잡아두는 장치. 그 안에 담긴 마음을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나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남았다.
꽃을 사주고 싶다는 마음.
이미 떠난 존재에게 아직도 무언가를 건네고 싶다는 감각.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꽃이 시들 것을 알면서 주는 것이다. 영원히 남지도 않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장 연약한 것을 골라 죽은 이의 곁에 둔다. 아마 그건 꽃이 죽음을 위로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갈 자리를 대신 맡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있을 때의 사랑은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고, 부를 수도 있었고, 체온으로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떠난 뒤, 그 모든 감각들을 다시 잡을 순 없어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다만 닿을 곳을 잃을 뿐이다.
꽃은 그 자리에 놓인다.
말 대신, 손 대신, 끝내하지 못한 마지막 문장 대신.
죽은 이의 곁에 놓인 국화는 조용히 향을 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향기가 그를 감싸 안고 나를 대신해 함께 떠나 주는 것 같았다. 마치 “이제 내가 함께 갈게”라고 말하듯이.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꽃을 주는 건 죽은 이를 붙잡기 위해서도, 애도라는 이름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남은 사랑이 혼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남아 있는 나를 위해서라는 걸.
꽃은 애도의 도구가 아니다.
꽃은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조용한 증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에게 꽃을 주고 싶다.
그건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사랑이 꽃을 따라 건너가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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