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니어인 30대 후배 B와의 대화>
B: 선배님은 호러장르도 좋아하시나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나: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무서웠던 영화 1위는 역시 <엑소시스트>야. 개봉된 지 50년이 넘어 고전의 반열에 들었고 혹자들은 뭐가 무섭냐고 항변하기도 하지.
B: 저도 봤지만 무섭다기 보다는 좀 특이했어요.
나: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라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미스테리 심리 스릴러이기도 해. 사실 선악의 대결이기도 하지만 딸아이를 지켜내려는 엄마의 의지와 자신의 어머니를 잘 보살피지 못한 아들 다미엔 신부(제이슨 밀러)와의 싸움이기도 하지.
B: 왜 그런가요?
나: 영화 초반에 보면 엄마(엘렌 버스틴)는 딸(린다 블레어)에게 빙의현상이 일어나기 전부터 길에서 마주친 다미엔 신부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어떻게 보면 엑소시즘을 원치 않았던 신부에게 끝까지 애걸해서 데려온 건 엄마였어.
B: 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나: 엄마는 꽤 주도면밀하게 아이의 이상 현상을 진단해. 첨에는 심리상담, 좀 지나서 정신과 치료, 그리고 결국은 종교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확신하지. 재밌지 않아? 정작 무신론자인 엄마가 신부에게 퇴마의식을 치러달라고 하니 말야.
B: 신념이 없이는 어려운 부탁이겠죠.
나: 원작 소설을 잘 각색했지만 어쩌면 소설속의 묘사를 어떻게 현실처럼 만드느냐가 이 영화의 관건이었지. 다시 말해서 악마가 진짜 있느냐는 거. 우주선이 달나라에 가는 현대사회에서 그걸 관객들에게 어떻게 믿게끔 하냐는 거지. 반대로 이 영화는 신의 존재를 역으로 증명하는 묘미도 있는 거야. 악마가 버젓이 존재하니 신의 존재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설득?
B: 하지만 개봉 당시에는 그저 오컬트 장면에 다들 기겁을 하고 극장이 난리가 났잖아요.
나: 사실 이 영화를 둘러싼 원작자와 연출가와의 갈등도 심각했어. 원작자인 윌리엄 피터 블래티는 카톨릭 신자에 영화의 배경도시인 조지타운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어. 어떻게 보면 영화 속 다미엔 신부가 원작자의 페르소나라고 봐. 하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인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은 이 영화를 보다 생동감있고 공포스럽게 만드는데 더 치중했지. 원작자가 젊은 신부의 인간적 고뇌와 희생정신, 선과 악의 근본적 대립에 천착했다면 감독은 흥행의 대박을 노린 거야.
B: 감독의 전략이 성공했군요.
나: 그런데 숨은 1등공신은 따로 있었어. 바로 특수효과를 맡은 딕 스미스야.
B: 처음 듣네요. 딕 스미스?
나: 지금은 흔해졌지만 인물의 변신을 위해 폼 라텍스와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기술을 고안해 낸 사람이지. 원래 예일대 치대에 진학하려고 공부하다가 2학년 때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1939)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1941)에서 사용한 분장기법에 대한 책을 읽은 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했어. 대단하지 않아?
B: 엑소시스트에서 그럼 그 무시무시한 분장을 맡았나요?
나: 그렇지. 아직도 회자되는 리건의 360도 머리회전, 얼굴 피부의 상처, 20센티가 넘는 혓바닥, 입에서 뿜어내는 오물, 그리고 복부 피부에 솟아오르는 ‘HELP ME’라는 글자까지 모두 그의 작품이야.
B: 그 장면들이 없었다면 좀 싱거웠을 거 같네요.
나: 2011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할 정도로 미국에선 거의 특수분장의 대부야. 실제로 <대부>에서 분장을 담당했어. <아마데우스>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하기도 했지. 그밖에도 <죽어야 사는 여자>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어. 분장의 마술사 릭 베이커도 딕 스미스의 제자야.
B: <혹성탈출>, <멘인블랙> 시리즈의 분장을 맡은 거장 릭 베이커 말씀이시군요.
나: 릭 베이커도 <엑소시스트>에서 특수분장 보조로 참여했었어. 참고로 소녀의 머리가 360도 회전하는 건 인형에 리모컨을 이용한 조작이었지.
B: 심령 영화에서 그런 특수효과는 일종의 스포일러겠어요.
나: 그래서 개봉후 20년 정도 지나서야 그 촬영의 비밀이 공개됐어. 예를 들어 침대가 공중부양하는 장면은 위에서 남자 여럿이서 끌어올리는 것이었고, 초록색 액체가 입에서 분출하는 장면도 작은 관을 통해 발사하는 것이었지.
B: 컴퓨터 그래픽도 없던 시절 당시 세트 환경에서는 꽤 창의적인 작업이었네요.
나: 사실 그 특수효과 촬영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야 난 <엑소시스트>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누그러들기 시작했어. 저게 다 치밀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구나. 화면에 나오는 압도적인 장면에 몰입되어 이성을 잃고 무서워했던 거구나 하고 말야.
B: 하하, 결국 악마의 존재는 딕 스미스가 만든 거네요.
나: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물론 차츰차츰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가 좌절하는 스토리텔링이 큰 역할을 하지만 <엑소시스트>를 보고 뇌리에 남는 건 사실 고약한 장면들이거든. 데미안 신부가 꿈꿀 때 갑자기 번쩍하고 지나가는 악마의 형상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도 많아. 따지고 보면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도 분장사고 비밀을 안 후 안도하게 된 것도 분장사니까 어쩌면 딕 스미스가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한 셈이야.
B: 분장도 분장이지만 음악도 무섭잖아요.
나: 마이크 올드필드의 전설적인 앨범 “Tubular Bells”의 인트로 부분이 영화에 사용되었지. 이 앨범은 연주곡인데 1600만장이 팔려나갔어. 잔잔한 음악인데 영화에선 음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바람이 부는 조지타운 도시에서 엘렌 버스틴이 걸어갈 때 휘날리는 수녀복마저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드는 숨막히는 연출이라니. 물론 빙의된 딸이 질러대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도 무시무시했지.
B: 결국 각본 외에 특수분장과 음향으로 공포감을 극대화 했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나: 바로 그거야.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부분을 공략하면 오히려 독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거라고. 우리나라 영화 산업에서도 저변이 넓어지려면 이런 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들 감독만 할 생각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