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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피 Jan 28. 2024

단톡방을 정리했습니다.

미셸 들라크루아 <Le coeur de paris acielrose>


대학 시절부터 스마트폰과 카톡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퇴근 후 톡을 금지한다!'는 문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카카오톡을 사내메신저로 쓰는 회사나 팀도 많았는데, 저는 특히나 카톡을 메인 사내메신저로 쓰는 회사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카오톡 애플리케이션에 '+999'라는 빨간딱지가 붙어 있는 게 너무나 익숙했어요. 언제나 단톡방은 많았고, 그 대화를 다 보지 못해 쌓아 두곤 했거든요.


그런데... 백수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단톡방에는 '+999'가 떠있었습니다. 이상하더군요. 이따금 들어가 보아도 제가 꼭 답해야 할 만한, 혹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화창은 몇 개 없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 톡들을 나는 받아보고 있는 걸까... 또 최근 언제인가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되면서 일반채팅과 오픈채팅이 나뉘었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일반채팅이 더 영양가 없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제 카카오톡의 각종 대화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실제 카카오톡 친구들로 구성된 방들도 많았지만,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픈채팅방도 많았어요.


며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니 놀랍게도...


1) 실제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열손가락으로 세어도, 손가락이 남는다.


2) 언젠가 자주 만나던 이들이 모여있던 단톡방은, 이제 아주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깨어난다.


3) 그런 단톡방들에서 나가기 애매해서 들어가 있지만, 이따금 누군가 주도 하에 모임이 열리면 괜히 부담스럽고 나가기 싫지만, 또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나간다.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4)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남겨두었던 단톡방이나 오픈채팅이 나머지 대다수이지만, 제대로 보는 일은 거의 없고 가끔 심심할 때 한 번씩 열어서 빨간딱지를 없앤다.



좀 슬프기도 하더라고요. 매일 노란 아이콘에 붙어있던 '+999'라는 빨간딱지에 저와 정말 소통하고 있는 메시지는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래서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저는 이 많은 단톡방과 오픈채팅방을 남겨두었던 것일까요? 그러다 최근 즐겨보는, 장동선 박사님의 유튜브 콘텐츠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https://youtu.be/h0yG0TIKvow?si=-QJ6yjS-v8iSKSya



여러 뇌과학 이론들을 이해하기 쉽게, 정말 재미있게 설명해 주세요. 이 편은 '권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저는 사실 십여 년 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왜 좋은 리더들은 빨리 넉다운이 되고, 정말 xx 같은 리더들만 승승장구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 편을 보니 딱 정리가 되었습니다.   뭐 한참 일을 하면서는, 이래저래 공감해 주다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잘 없겠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말입니다. 여하튼,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면 사회적 권력에는 4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열과 정보, 사회적 자본과, 대안... 딱 단톡방에 적용되는 내용들이 아닌가 싶었어요. 언제부턴가 SNS나 메신저들을 켜두면, 유명하거나 혹은 높은(?) 사람과도 비교적 연결이 되기 쉽고, 왠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그게 다 나의 사회적 자본도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으며, 그렇게 다양한 이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대안 찾기가 쉬울 것 같다... 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된 거죠.


그렇지만 마음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실제 물상이 있는 물건을 버릴 때처럼 생각해 보니... 사실 최근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2-3명이 있는 소수의 대화방을 제외하고는, '4가지 사회적 권력'을 포함하고 있다는 눈속임만 있을 뿐 거기에 정말로 '4가지 사회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그 방들에서 '나가기' 버튼을 누르려고 하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흔히들 말하는 'FOMO(fearing of missing out)'였죠.


그래서 실제로 제거 후보가 되는 단톡방들을 고르고 나서도, 실제로 '조용히 나가기'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스스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며, 다짐의 다짐을 거듭했어요. 이 방에서 실제로 내가 얻는 정보는 별로 없고, 필요한 정보도 없다. 언젠가 연이 닿았지만 이제는 멀어진 이들이거나 혹은 얼굴도 모르면서 이 방 안에서 떠들고 놀았던 사람들이라 다시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 그저 보고 싶거나, 궁금하거나 한 사람이라면 1:1 톡으로도 충분히 연락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어요.


그러면서도, 아주 대형 단톡방은 별 부담이 없었지만 소규모 인원이 있는 단톡방에 대해서는 '조용히 나가기'하면 왠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방의 누군가가 조용히 나간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지 굳이 이상한 생각은 할 것 같지 않아. 그리고 뭐 필요하면 따로 연락하겠지?'라고 합리화도 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약 2주에 걸쳐 단톡방을 정리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빨간 딱지는 거의 항상 떠있네요.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나 봅니다.


이번에 생각했습니다. '소박하게' 사는 방식에는 단순히 돈이나 물건, 먹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줄임'도 포함된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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