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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피 Jan 18. 2024

하루 하나 비움 챌린지

애나 메리 모지스 <전원 풍경>


새해맞이로 신발장에 고이 잠들어 있던, 한 번도 안 신었거나 혹은 두세 번 신어 아직은 새것 같은 구두 몇 켤레를 당근으로 나눔 했습니다. 처음에는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신게 될 것 같아서 두었고 그다음 몇 년은 도무지 신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버리기엔 아깝고 팔리지는 않을 듯하여 모셔두었던 거죠. 그러다 또 몇 년이 지나니... 뭐 하러 저걸 저렇게 끌어안고 있나 싶어서 당근에 나눔으로 올렸더니 30분도 되지 않아 새 주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신발장은 넓어졌고, 마음은 조금 가볍습니다. 이제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구두를 생각하며 헛돈 썼다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저는 고향이 지방이라 대학 무렵부터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30대 중반에서야 했으니 십여 년을 혼자 살았고, 세 번 정도 이사를 했습니다. 신혼집으로 합치기 위해 짐정리를 하는데... 무려 스무 살 대학 과제 프린트물부터 10대 때 썼던 다이어리까지 아주 다양하게 숨어 있던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운 화초서생은 기함을 했죠. 그리고 그렇게, 하루 하나 비움 챌린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참 이상했어요. 붙박이장 한 구석에 숨어있던, 이사를 다니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물건들부터 몇 년 전에 사두고는 라벨을 떼지도 않은 옷, 심지어 있는 줄도 몰랐는지 두 벌이나 있었던 옷... 지난 1년을 돌아보아도 한 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물건을 손에 쥐고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보면 모두 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또 언젠가는 필요할 것만 같은, 강한 자기 암시가 시작되지 뭐예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무엇인가 버리고, 비운다는 것도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한참을 끙끙대자 화초서행은 각종 비움 기법들을 활용해 챌린지를 제안했습니다. 하루에 하나, 버리든 나누든 비우는 겁니다.











깨끗한 박스 하나, 기부할 물건 담아 보기


먼저 깨끗한 박스를 하나 준비해 열어두었습니다. 생활하다 하루에 하나씩은 꼭 버리거나 나눔 상자에 넣어야 했는데... 기부할 깨끗한 물건을 담을 박스였죠. 세 박스를 채우면 아름다운 가게에서 픽업을 해준다니, 세 박스까지 모아야 했습니다. 그저 나눈다는 생각보다는 왠지 기부한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아깝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박스를 채우는 건 일단 그나마 쉬웠습니다. 선심 쓰듯 넣으면 됐으니까요.


여행을 다니며 사 왔던 여행지의 기념품이나, 특히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사 왔던 스타벅스 머그컵이나 텀블러들. 라벨도 떼지 않은 옷이나 가방, 신발 등 잡화류. 저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그 감흥이 사라져 버린, 아직은 멀쩡하지만 저에게는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을 만한 것들을 모두 담았습니다. 수납장 몇 칸이 비워졌고, 옷장도 훨씬 가벼워지니 어쩐지 좋아지는 기분이란. 비우는 것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어요.






하루 하나 무조건 버리기


화초서생은 한꺼번에 버리기보다는, 하루에 하나씩 쓸모없는 것들부터 버려보자고 했습니다. 하루에 하나라니, 일단 부담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랍 구석에 굴러다니던, 유통기한도 지난 인공눈물들,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들, 유통기한 지난 식료품들부터 버렸습니다. 그저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남아있던 것들이라 전혀 어렵지 않았고, 하루 하나니까 쉬웠습니다. 화장실 가다 하나, 설거지하고 하나, 옷 갈아입고 하나 이렇게 눈에 띌 때마다 하면 됐으니까요. (하루 하나지만, 한 번에 여러 개 눈에 띄는 것들을 정리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거의 한 달 정도 해보니... 저의 게으름으로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사용기한을 넘긴 것들이 거의 정리된 느낌이었습니다. 집이 훨씬 깨끗해지고, 저도 왠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부끄럽지만요. 그래서 이 습관은 유지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시즌 테마별로 정리하기



다음으로는, 주간 테마를 정해서 비울 물건들을 골라봤어요. 한 주는 옷, 한 주는 책, 한 주는 잡동사니... 이런 식으로요. 커다란 재활용 가방 같은 것을 가져다 두고, 주말 하루 정도 정리해 보는 거죠. 우선은 재활용으로 버릴 것들과 팔 수 있는 것들로 나눴습니다. 옷은 재활용 수거함에 넣거나 당근으로 팔았고, 책도 재활용으로 버리거나 중고서점에 팔았습니다. 잡동사니들은 보통 버리거나 당근을 했어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자면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 느낌인데, '이번주는 옷장'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편했습니다. 듣기 좋은 노래를 틀어두고, 정리하는 겸 움직이는 게 나름 재미도 있었거든요. 테마별로 더 쉬운 게 있고, 더 어려운 게 있었습니다. 책은 상대적으로 좀 쉬웠고, 옷은 좀 더 어려웠어요. 큰맘 먹고 산 좋은 브랜드의 옷인데, 2-3년에 한 번쯤 입을 일이 생기는 이 옷은 남겨두는 게 맞을까 비우는 게 맞을까 한참을 고민했죠. 뭐 정 고민이 되면 남겨두고 1년 후를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1년 후에도 여전한 취급이라면... 그때의 내가 고민하라지, 하면서요.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채우는 일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들이라고는, 쓸모도, 재사용 가능성도 없지만 왠지 버리기 싫은 것들이었거든요. 옛날 사진, 주고받은 엽서나 편지들, 다이어리나 여러 기록들... 누군가에게 받은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들, 왠지 오래 사용해서 정이 들었지만 이미 너무 낡아버린 것들... 이런 것들이요.


그래서 이 100리터 쓰레기봉투 몇 장을 채우기 위해 몇 단계를 거쳤는지 모릅니다. 일단, 방 한 구석을 비워두고 후보군이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가져다 쌓았어요. 거의 산처럼 쌓이더군요. 다음으로, 쌓여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아, 이건 그때 거였지.' 이 생각을 수백 번 반복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니, 이것마저 없으면 평생 떠올리지도 못하는 것 아닐까?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습니다. 개인정보나 여러 정보들이 기록돼 있는 것들도 많아서 그런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야 했어요.


화초서생은 A4용지가 들어갈만한 작은 틴케이스 하나에, 추억으로 갖고 싶은 것을 담으라고 했습니다. 나머지는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두고 버리라고요. 클라우드 서비스들이 얼마나 좋은데, 정말 빠르게 다시 볼 수 있다면서-. 여하튼 저에게는 눈물겨운 작업이었습니다.






27인치 캐리어로 6개월을 살아봤으면서....




비움 챌린지를 시작하기 1년쯤 전, 저는 여행과 출장 등으로 거의 6개월을 캐리어 하나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캐리어가 터질 것처럼 가득 찼고, 무게를 넘겨 공항에서 쭈그리고 앉아 물건을 재배치하고 끙끙대며 핸드캐리하기도 했는데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면서... 캐리어에는 점점 더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끌어안고 가야 사용하지 않는데, 무거운 캐리어를 끄느라 내가 너무 힘들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거든요. 없어도 괜찮은 물건도 많았고, 현지에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마련하는 게 더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는 '나도 이제 미니멀리스트 대열에 들어선 것 아닌가' 하고 자만했습니다. 사실 마음 한편에는 '집에 다 있다-' 하는 안도감이 숨어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비움 챌린지를 진행하며 종종 캐리어 하나로 생활하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옷은 몇 벌만 있으면 빨아서 입을 수 있고, 생필품은 떨어지면 구하면 되고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웬만한 데서는 웬만한 제품을 다 구할 수 있더군요.), 여러 생활편의/미용을 위한 도구들도... 사실 쓴다고 뭐 대단히 티나지도 않고, 또 없어도 정말 필요한 기능은 어떤 식으로든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그 기억을요.





3년 이상 지속된 비움의 마상....




사실 이 비움 챌린지를 하면서 가장 놀란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었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돈을 그렇게 마구 써왔던 건지, 이렇게 버리는 물건들로 얼마나 환경오염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인지... 버리는 과정에서 자책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저 스스로가 너무너무 멍청하고 무식하게 느껴졌거든요.


결국 신혼집에는 모두 다 해서 박스 10개 남짓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즈음에는 박스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거의) 다 알았죠. 그럼에도 버리지 못했던 예쁜 쓰레기들이 많았는데... 화초서생은 가끔 장난을 쳤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어딘가에 숨겨 두는 겁니다. 빠르면 하루, 보통은 일주일, 오래 걸리면 한 달이 지나도록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했어요. 그럴 때면, '내 거에 손대지 말라!' 하면서 괜히 그 물건들의 용도를 만들어 '올해 사용 완료!'라고 나름대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어쨌든 그 시기의 비움챌린지는 마상을 남겼고, 저는 거의 2-3년 간 옷이나 신발과 같은 것은 일절 사지 않았습니다. 예쁜 쓰레기가 될만한 장식품들은 물론이고요. 꼭 필요한 생필품만 샀습니다. 문득문득 반짝거리는 새 물건들을 볼 때마다 카드를 꺼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랐지만, 아직 남아있던 마음의 상처가 그 욕망을 잡아끌더라고요. '또 그 경험을 하고 싶어?' 비움의 마상은, 구매할 때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인지, 정말로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환경오염에 기여하는 선택은 아닐지... 여하튼, 헛돈을 덜 쓰게 된 게 가장 큰 배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매년 연초마다, 혹은 짬이 날 때마다 조금씩 비웠습니다. 친구 아이에게 선물할 일이 생기면, 제가 싸들고 다니면 보물상자에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기념품이나 책을 꺼내 함께 담아주곤 했어요. 주말에 뒹굴거리다 생각이 나면 당근에 하나씩 올려보기도 했습니다. 매 계절마다 옷장을 정리하면서 버리다 보니, 이제 안 입는 옷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있긴 합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의 총량




아직도 서랍 구석에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숨어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어와 쌓이는 물건들이 많더라고요.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비우지 않으면, 이 물건들도 계속해서 쌓여가겠죠.


이렇게 몇 년을 살면서는, 웬만해서는 무엇이 어디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이상으로 물건을 늘리는 게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물건을 사는 편이었는데, 여러 가지 신경을 써서 물건을 하려고 하니, 사고자하는 의지가 떨어지는 건... 다행인 거겠죠. 사용해서 없애버리는 종류가 아니라면 고민하는 게 귀찮아 '나중'으로 미루다 잊어버린 적도 많아요.


아, 이렇게 물건들을 비우면서는... 원래도 별로 없었지만, 몇 있었던 값나가는 것들도 당근으로 팔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집에 값나가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왠지 걱정할 것도 별로 없어서 좋아요.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강도가 들어도, 불이 나도 별로 걱정할 게 없다랄까요? (가끔은 걱정할 게 있었으면 싶어지기도 합니다만....)





 







새해맞이로 또 비움챌린지를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1월이 절반이나 지난 지금까지 겨우 신발 몇 켤레 당근으로 나눔 한 게 다입니다. 그게 마음의 짐처럼 계속 머물고 있어, 이렇게 브런치 글도 길게 써보았나 봅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올 한 해 가볍고 자유롭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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