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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피 Feb 05. 2024

커피 한 잔으로 오마카세의 즐거움을 누리는 법

그림 : 로렌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


커피 한 잔으로 어떻게 오마카세의 즐거움을 누리냐고요? 간단합니다. 아주아주 가끔, 스스로 정한 기준에 맞춰 딱 한 잔을 마시면 됩니다. 그러면 커피의 향과, 색과, 온도의 변화에 따른 맛과, 그 쌉싸름한 끝맛과, 심장을 뛰게 하는 카페인의 활약까지 섬세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오마카세나 파인다이닝이 주는 눈과 코와 입과 귀의 향연을,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절제하면서 가끔 먹는다면요.


저는 태생적으로 비쩍 마르고 병약한 체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입이 짧았고, 부모님은 먹고 싶은 건 얼마든 먹도록, 먹기 싫은 먹 먹지 않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먹기 싫은 걸 남기는 건 당연했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과다하더라도 원하는 만큼 먹는 습관을 가지고 자랐어요. 특히,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한다'가 온몸에 학습되어서 그런지, 이따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욕구'가 따라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자라면서 어느 정도 건강해졌고, 먹성도 좋아졌습니다. 이상하게 많이 먹어도 살은 찌지 않는 체질이 되었어요. 동시에 먹어도 계속 '허기'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한창 자랄 때라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저는 조용히 많이 먹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딱히 입이 고급이라거나 하지는 않았고, 질보다 양이 중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더 나이 들면서는, 제 능력이 아닌 주변 환경으로 인해 고급 식당에서 식사할 일들이 많아지더군요. 내 돈으로 먹는다면 손을 벌벌 떨었겠지만 내 돈이 아닌 (대체로) 법인카드였으니까 맘 편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참... 풍요의 저주랄까요. 그렇게 좋은 것만 먹다 보니 세상에 맛있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 끼니 유명 레스토랑에서, 인당 몇십만 원짜리를 먹는데도 깨작대며 남기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음식은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떤 기분에서, 누구와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그 후에는 고급스러운 걸 딱히 찾지 않고, 적당히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습니다. '못 먹는 거 있어요?'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날 육고기 종류 외엔 거의 다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건강이라거나 절제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죠. 그러다 화초서생을 만났고, 대대적인 식습관 개선 프로젝트의 서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는 반대로 화초서생은 어려서부터 먹는 것의 중요성을, 건강한 식습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이에 비해 드물게 맛이나 분위기보다는 건강을 더 생각하는 편이기도 했고, '무엇을 먹고 싶다'하는 강한 욕구보다는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에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무엇인가를 먹을 때마다 몸에서 변화를 느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콜라, 라면,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자극적인 음식들 등등을 먹을 때요.


저는 처음에 '그게 말이 돼?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양한 가공식품들이 먹고 싶었지만, '너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호소에 노력해 보기로 했습니다. 최소한 콜라/사이다와 같은 탄산음료, 라면류의 MSG로 맛을 내는 음식들, 가공육 제품들만이라도 피해 보기로 한 거죠. 약속한 후에 탄산음료는 탄산수로 대체하고, 라면류는 짬뽕이나 칼국수류로 대체했지만, 가공육들은 끊기 어려웠습니다. 구운 베이컨을 올린 브런치, 햄이 들어가야 맛있는 볶음밥... 결혼 후에도 여전히 눈치 보며 이따금 이런 종류의 식재료를 들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건강상의 문제로 의도치 않게 식단관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먹는 양 대비 살이 안 쪘다 보니 다이어트를 위해서 식단관리를 할 필요도 없었기에...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기대볼 방법이라곤 식단관리밖에 없었기에, 시작해 보기로 했죠. 제가 지켜야 할 기준들은 단순하면서도 어려웠습니다.



카페인 끊기

단당류 끊기 (빵, 면 등 밀가루, 설탕/초콜릿 등)

채식 70% + 육식 10% + 통곡물 20% 수준 유지하기

가공식품 끊기

환경호르몬 피하기




식단 시즌1 : 2주 간의 투쟁




처음에는 우선 2주 정도 식단을 맞춰보았습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매일 매 순간이 자기 연민과 분노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뭘 어쨌길래, 먹고 싶은 커피 한 잔, 쿠키 하나 못 먹게 하시나요?'하고 화내기 시작해서, 종국에는 '내가 너무 불쌍해...' 하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쌓인 소소한 스트레스를 날리고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돌게 했던 카페인과 달달구리들, 그리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갑자기 끊자 온몸에서, 마음에서 말 그대로 난리부르스가 난 듯했죠. 인내심이 몹시 낮아지고, 날카로워지며,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그냥 무식하게 먹었습니다. 요리도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저 샐러드 야채와 채소들, 두부, 병아리콩, 소고기 등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고 그때그때 꺼내 먹었죠. 맛도 없고, 먹기 싫다 싶었습니다. 조미료도 올리브오일, 간장, 소금, 후추... 정도 외에는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끔찍할 만큼 힘들고 괴로웠던 2주간의 식단을 끝내던 날, 병원 시술을 다녀와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서도 냉동실에 있던 소금빵 생지를 구워 먹었습니다. 따끈하고 촉촉한, 버터향 가득한 그 빵이 어찌나 맛있던지요? 한동안 약도 먹어야 했기에 속이 쓰렸지만 커피도 마셨습니다. 그 커피의 향,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던 카페인의 역동성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2주간의 식단을 끝낸 후 가진 치팅데이들은... 그야말로 즐거움과 쾌락의 나날들이었어요.





식단 시즌2 : 3주 간의 타협




짧은 치팅데이동안 그간 먹고 싶었던 것들을 몽땅 먹었습니다. 자극 가득한 밀키트도 주문하고, 외식도 하면서요. 그런데 그때,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음식이 자극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습니다. 상상 속에서는 녹아내릴 것 같은 맛이었는데 막상 먹고 나면 '음, 좀 자극적이네? 속이 불편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럼에도 치팅데이의 끝을 아쉬워하며 다시 식단관리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일주일을 늘려서 3주간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라는 걸 써서, 인터넷과 유튜브로 다양한 레시피들을 파악했죠. 샐러드도 나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그나마 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고민했습니다.


시즌1에 비해서는 분노와 자기 연민을 덜 느꼈어요. 수용의 단계로 넘어갔던 것일까요? 그리고 2주간 해봤더니, 금방 시간은 가고 곧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치팅데이가 온다는, 그 안도감도 마음속에 자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시즌2는 시즌1보다 훨씬 수월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3주 후 드디어 맞이한 치팅데이, 그때부터 뭔가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저는 매일 커피 한 잔을 기다리며 눈을 뜨는 사람이었기에 커피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었어요. 그 향을 맡고, 맛을 봐야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었거든요. 커피를 끊고, 루이보스나 허브티를 마시자면... 음... 시트콤 보고 싶은데 EBS를 봐야만 하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적절할까요? 여하튼, 그랬는데 두 번째 식단 시즌을 끝내고 커피를 마셨을 때 카페인의 작용과 부작용이 너무 잘 느껴지는 겁니다. 일단 커피를 마시면 그날 하루는 에너지가 넘칩니다. 생산성이 높아졌고요. 그리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엔 또 커피가 필요했죠. 화초서생은 '대체 그러면서 왜 마셔?'라며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다른 음식들도 비슷했어요. 단지 2-3주 식단을 관리했을 뿐인데... 배달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뭔가 불편했어요. 신경도 예민해지고, 마음까지 뭔가 불편해지는 것 같고... 가공식품은 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식단관리에 대한 회의감이 올라왔죠. '나는 이제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건가...?' 하고요. 그렇게 시즌2의 치팅데이도 끝이 났습니다.




식단 시즌3 : 어쩌면 적응?! -ing




그리고 시즌3는 약 2개월 간, 그리고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꽤나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먹지 못하는 것도, 초콜릿이나 빵을 먹지 못하는 것도 참을만합니다. 마음 한 켠에서는 '언젠가 다시 자유롭게 먹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때도 가능하면 적게, 정말 맛있는 걸 먹자'하는 의지도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식단을 하면서 더 '밍밍한 맛'에 민감해진 까닭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자극적인 것들을 끊고 나자, 먹을 수 있는 재료들 사이에서 다시 맛의 스펙트럼이 만들어졌다랄까요? 예를 들어, 샐러드를 먹을 때 넣는 방울토마토가 그렇게 상큼할 수 없고, 아보카도가 크리미 하며 고소합니다. 견과류는 또 얼마나 맛있고요. 루이보스티도 그 은근한 맛과 향이 참 좋다 싶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따금 '엄청 매운 떡볶이' 같은 것들이 생각나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전에는 생각하자마자 군침이 돌면서 당장 먹지 못하면 꼭 세상이 끝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맛있겠지만, 속은 좀 불편하겠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비하면 현저히 적게, 먹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요. 그러면서 어차피 오래 살아야 하면 건강하게 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면 좀 식단관리도 꾸준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저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식단관리를 해야만 하고, 하고 있기 때문에 화초서생에게도 '나중에 막 먹을 수 있어도 이제 적당히 관리할래. 몸에 안 좋은 것들은 아주 가끔, 정말 맛있는 걸로 보상처럼 먹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또 한 번 그런 음식들이 들어가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어요.


이런 식단의 장점은, 냉장고도 소박해진다는 점입니다. 먹을 수 있는 기본 재료들은 한정적이니 그것들로 채우고, 그 재료들을 가능하면 다양하게 활용하는 건 저의 몫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재료들을 사용해야 하다 보니, 남겨 버리는 일도 줄어들더라고요.








식단을 관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먹는 것이 생각보다 삶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는, 수면입니다. 확실히 식단을 지킬 때, 잠이 더 편합니다. 잠을 잘 자니, 하루가 더 편해지고요. 수면부족이나 피로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다독이기 위해 커피나 달달구리,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어야만 했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가 렌틸콩과 귀리밥, 채소와 베리류만 먹고 단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술을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고 매일 똑같은 양의 운동을 기계처럼 할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경박단소한 식사, 충분한 신체활동, 회복수면 등의 생활습관을 만들어 유지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오히려 병이 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오기도 한다. 주로 20-30대가 이런 질문을 많이 하는데, 스트레스를 화끈하게 풀고 지금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나은 삶이 아니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반대다. 건강한 식사나 신체활동, 회복수면, 절주, 머리 비우기의 공통점은 우리 몸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준을 낮춘다는 점이다. - 정희원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중



최근 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정희원 선생님의 말씀을 경험으로 느꼈습니다. 식단을 관리하는 게 처음에는 힘들지만, 하다 보면 훨씬 편하다는 것을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저는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먹는 것 말고도 스트레스가 훨씬 많아질 테니까요.)


그렇다고 이제 커피나 디저트, 맵고 짠 음식들, 라면 등등을 아주 안 먹겠다는 건 아닙니다. 스스로 정한 주기에 맞춰, 이따금의 일탈처럼 그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정말 맛있기는 하니까요. 먹고자 하는 욕망과의 사투,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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