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와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새 5일 차, 호주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꿈만 같다. 꿈같이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아니고 모든 시간들이 그저 찰나와 같이 스쳐 지나간 것 같다. 5개월이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 새롭게 느끼고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호주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생긋 웃는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스몰토크를 건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엘리베이터나 버스에서 사소한 배려를 하고 버스 기사님께 “Thank you”를 크게 외치며 하차한다. 이 모든 것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점차 익숙해졌고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한국에 꼭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삶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삶이 주는 여유, 저녁이 있는 삶 때문이라고. 물론 호주에서도 밤낮으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도 봤다. 하지만 대부분 가게가 4~5시에 문을 닫고 그때쯤 퇴근하는 사람이 많다. 처음에는 내가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던 ‘워라밸’이 이곳에 있었다며 환호를 질렀다. 이방인으로서 바라본 호주 사람들의 삶은 여유와 행복 그 자체였다. 사람 닮게 사는 삶, 이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젊은 부부가 아이 둘, 셋을 데리고 해가 지지 않은 평일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해가 지지 않은 평일에 부부가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도 아닌 둘,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고 키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3살짜리 조카를 키우고 있는 언니는 나에게 둘째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집 대출에 아이 양육, 생활비, 친정과 시부모 노후를 생각하면 깔끔하게 포기가 된다고 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집 사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호주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부러웠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평소에 보지 못하는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유럽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나라를 물어본다면 단연 스위스를 외칠 것이다. 처음 마주하는 자연의 웅장함은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호주는 무엇이든 크기가 남다르다. 나무부터 곤충, 호주의 비둘기 같은 새인 빈 치킨까지 모두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높은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넓게 펼쳐진 지평선과 수평선을 쉽게 마주한다. 눈이 트이는 공간감과 푸르른 녹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키가 작은 편인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다행히 브리즈번은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 인파가 몰리는 경험을 자주 하진 않았지만, 시드니 같은 대도시에 갔었다면 나는 꽤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키가 무지 크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어린아이들까지 길쭉길쭉한 형체가 나를 압도했다. 처음 호주에 갔을 때, 길거리에 외국인(호주에선 내가 외국인이었지만..)들만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길거리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인종이 섞인 무리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백인은 백인끼리, 아시안은 아시안끼리 커플은 물론이고 친구로 보이는 무리조차 인종이 섞인 무리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친구와 함께 열띤 토의 하며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아마 호주는 이민자나 워홀러가 많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어차피 일정 기간 동안 머물다 떠날 사람들이라 쉽게 못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언어가 편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주 외 다른 나라들은 살아보지 못해서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이것이 오직 인종의 이유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호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콜롬비아, 일본, 파키스탄, 이탈리아, 대만, 오스트리아 등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과 대화를 해보았다. ‘서양인은 모두 외향적이다.'라는 것은 편견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아서 더 어려웠다. 내가 유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더 쉽고 재밌게 적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간혹 인종차별도 당했다. 호주에 온 지 2주가 안되었을 때, 길거리 벤치에 앉아 있는 나와 친구를 향해 자동차 창문을 밖으로 물을 뿌리고 도망가는 백인들을 마주했다. 그것도 30분 내에 두 번이나 당했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이라 당혹스럽고 두려웠다.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이 무척 서글펐다. 한동안 길거리에 보이는 백인 무리들을 경계하며 다녔다. 그 이후로도 개 짖는 소리나 캣콜링 등 종종 인종차별을 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의연해졌다. 이방인으로서 이 세계에 얹혀있다는 느낌이 이따금 나를 외롭게 만들긴 했다.
나는 외국에 대한 환상이 없는 사람이었다. 변화를 꺼려하는 보수적인 성격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러나 호주에 와보니 새로운 세상과 문화를 마주하는 것은 제법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것을 깨닫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 오기 전에는 항상 현실적인 울타리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으려 노력했었다. 그러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 나는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지금은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무엇이든지 일단 부딪혀보자!’ 그러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어렴풋한 희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삶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만 바꾼다면 그곳이 어디 인가에 상관없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리웠던 것은 빠른 한국의 시스템이다. 호주에 가기 전에 뭐든 한국처럼 빠른 시스템을 기대하지 말라는 글을 보았다. 실제로 겪어보니 정말 그랬다. 내가 사는 아파트먼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1대밖에 작동이 안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로비에서 20~30분을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한국이었으면 하루 이틀 만에 고쳐졌을 상황이었지만 약 2주 간을 고장 난 상태로 두었다. 우버 이츠를 받으러 18층을 계단으로 내려가기도 했지만 익숙해지니 나름 살만했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이 빠른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일하기 때문이구나 깨달았다.
한국에서도 노출이 있는 옷에 대해 거리낌이 없던 나지만 호주 사람들의 자유로움에 깜짝 놀랐다. 노브라에 흰 티를 입은 사람들도 많고 자신의 체형에 상관없이 나시나 짧은 옷들을 즐겨 입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국에서 나는 항상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통통한 편이라고 생각했고 늘 스트레스받았다. 근데 지금은 날씬한 것과 상관없이 탄탄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싶다.
이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이곳에서 많은 한국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각자 목표가 있었지만 몇몇은 그저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민자의 삶 또한 그랬다. 한국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 호주에 왔지만 그저 작은 한국에 살고 있는 듯했다. 호주에 머물면서 '어쩌면 여기에 살아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확신이 들 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없었다. 돌아올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디서 살든 내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호주에 살아도 죽고 싶은 만큼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도 안분지족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일단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보자고 다짐했다. 만약 다시 가고 싶다면 확실한 준비를 해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듯 온 호주에서 나는 답을 찾진 못했지만, 지루하기만 하던 내 삶에 다시 꿈꿀 수 있는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주변 어른들께 야무지다는 소리를 들었다. 늘 나보다 어린 남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철이 빨리 들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무엇 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호주 워홀은 나에게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잘하고 싶었다. 어디를 가든 당당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모든 잘 해낼 수 있다고 괜찮다고, 스스로 되새김질했지만 사실은 조금 힘들었다. 나는 강하고 싶은 사람이지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쯤이면 내가 나를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어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이 있다.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나의 마음을 돌봐줄 수 있을 것 등 말이다. 아직 나는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다.
얄팍한 영어 실력은 호주 생활에 걸림돌이었다. 영어를 더 잘했더라면 훨씬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쉬운 점이지만 처음부터 이럴 줄 모르고 간 것도 아니었다. 섣부른 나를 탓해야지. 돌아와서도 영어 회화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영어를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나에게 한층 나은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번의 새로운 세상을 위해 꾸준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