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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언 May 06. 2024

비 vs 나

돋보기로 바라보는 일상

#1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신발은 수족관이 됐다.

체감상 양말 안에 미세 물고기

서너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집에 들어와서 발을 보는데

평소보다 새하얗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너네 닥터 피쉬였니?



#2

건물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데

어떤 친절하고 정신 나간 인간이 불을 끄고 나갔다.

5% 남은 휴대폰 배터리로 후레쉬를 키며

간절히 신을 찾았다.



#3

사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걷는데

강력한 비바람이 등을 떠밀어줘 편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미래에는 이런 발명품이 개발되어

자동 걸음 모드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갑자기 역풍이 불어 우산이 단계별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나는 #2의 여운으로 정신이 가출해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 뒤집어지네.'

'어? 뽑히네.'

'어? 부서졌네.'


친구야 네 우산이야

처음에는 좋다고 신나서 뛰어다녔다.

문제는 여기가 버스로 집까지

20분 걸리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념으로 셀카도 찍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폰이 꺼졌다.

앞서 말했듯 내 배터리는 5퍼 이하였는데

노래 들으면서 사진이나 찍고 있으니

자연사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휴대폰도 없이 젖은 채로 기다리는데

버스 시간이 갑자기

4분에서 26분이 되는 마법이 벌어졌다.


젠장, 나는 당장 다른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고

결국 저 상태보다 2배는 더 젖은 채로

물기를 뚝뚝 흘리며 버스에 탑승했다.

한 손에는 너덜너덜한 투명 우산을 들고 말이다.


버스 안에서 어떤 여자애가 킄킄 웃는 소리를 냈는데

나를 보고 비웃은 건 아닐까 하는

피해의식이 들 정도로 꼴이 장난 아니었다.

그래서 배터리도 없으면서 계속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와

고단한 하루가 마무리됐다.


나름 재밌었다.



#4

오늘 비에 젖은 옷들을 손빨래하고

구겨지지 않게 탈탈 털어서 옷걸이에 거는데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아빠가 된 것만 같았다.


처음 등교하는 초등학생 아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며


"아들, 기죽지 말고 가슴 펴고 허리 세우고 !

누가 뭐래도 구겨지지 말고 꼿꼿이, 당당하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고 결연하게 말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빨래 널면서 이상한 망상하는 나, 제법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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