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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Mar 06. 2024

승무원이 된 헬스 트레이너

달빛에서 본 꿈

  연속 3일째 국내선 비행이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탓에 여기가 청주인지, 제주인지, 부산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같은 갤리를 쓰는 후배와는 비행 내내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 말고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있거나 낯을 가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서로를 위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서비스를 끝내고 갤리로 돌아와 점프싯에 풀썩 앉았다.

 아기 요람처럼 흔들리는 비행기, 웅- 거리는 엔진 소리, 은은하게 켜져 있는 갤리 조명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눈을 치켜뜨려 애써보지만 파르르 떨릴 뿐이다. 눈꺼풀을 담당하는 감각 기관이 고장 났나 싶을 정도다.

 결국 밀려오는 졸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둥실 거리는 비행기에 몸을 맡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간 덜컹하는 난기류에 놀라 퍼뜩 눈을 떴다. 

 후배에게 이 모습을 들켰나 싶어 그가 앉아있는 반대편 점프싯을 향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조는 모습을 들키기는커녕 그도 역시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비행했다가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말이라도 걸어서 잠이나 깨야지'라는 마음으로 후배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ㅇㅇ씨!......"


 졸고 있던 후배는 나의 부름에 움찔거린다. 마치 졸고 있지 않았다는 듯 등허리를 꼿꼿이 세워보는 후배이다.


 "네, 선배님!..."

 내가 한소리 할 줄 알았는지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너무 피곤하죠? 나도 3일째 국내선 비행이라 너무 힘드네.. 우리 얘기하면서 잠 좀 깰까 봐요."

 그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 달 비행시간은 몇 시간인지, 다음날 스케줄은 어디 가는지와 같이 승무원들이 비행하면서 흔히 하는 뻔한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런데 ㅇㅇ씨는 어쩌다 승무원이 하고 싶었던 거예요?"


 회사 면접 질문 때 나 들어볼 법한 질문 해서 그런지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이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승무원을 하기 전에 헬스 트레이너로 일을 했었어요.
일이 불안정하다 보니까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자취 집에서 빨래를 널다가 창문 밖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해볼까?'라고 말이죠.
못 믿으시겠지만 정말 그랬어요.


 '여행을 좋아해서요', '비행기에 탔을 때 승무원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요.'와 같은 뻔한 대답? 을 생각했지만 신선한 답변이 돌아왔다.


 "엥? 정말 달을 보고 결심을 했다구요?!"

 엉뚱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났다.


 "네, 그래서 그 뒤로 취업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결국 승무원이 돼서 선배님이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지만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말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와 우연히 국내선 비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6년 전 나누었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ㅇㅇ씨! 나 ㅇㅇ씨가 밤하늘에 떠있는 달 보고 승무원 하기로 결심한 거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너무 인상 깊었잖아."

 "헉 사무장님! 그걸 기억하고 계세요?"


 그는 예상치 못한 나의 기억력에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우리는 6년 전 비행 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며 후일담을 이어나갔다. 서로 몰래 졸았으면서 아닌척했던 이야기, 달을 보고 꾼 꿈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던 6년 전 비행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수다스러웠던 비행을 끝내고 호텔로 들어가기 전 후배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사무장님, 저희 랜딩 비어 하러 가실래요?"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인상 깊게 기억된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하게 된 ‘우연한 계기 또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후배의 경우, 밤하늘의 달이 승무원의 꿈을 일으켰다.

 나의 경우,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너는 승무원 하면 딱이겠는데?”라는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승무원의 꿈을 일으켰다. 그저 ‘우연한 계기 또는 사건’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셈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연한 사건을 맞이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기에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혹시 모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PS. 얼마 전 그 후배의 사직 소식을 듣고 말았어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는 또 밤하늘의 달빛을 보다가 새로운 꿈을 꾼 걸까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글을 쓰다 보니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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