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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May 16. 2024

승무원이 여권을 잃어버렸다

  (1편에 이어서)


  '어??? 뭐야?... 여권이 어딨지?'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설마 아니겠지라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캐리어 지퍼를 죽 내려 가방 입구를 벌려본다.


  '밤샘 비행 때문에 피곤해서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야.'

  침착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여권을 찾는 내 손은 미세하게 떨린다.

  가방 안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부랴부랴 화장실로 달려갔다. 주변 사람들이 내 캐리어 내용물을 보든 말든 화장실 한쪽에서 캐리어를 확 펼쳐 뒤적거린다. 운동화 안에 여권을 넣었을 리가 당연히 없지만 실오라기 잡는 심정으로 운동화를 탈탈 털어본다. 순식간에 캐리어는 쑥대밭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기억을 다시 되감기 해본다. 클락에서 출국심사하고 여권을 캐리어에 넣은 것까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비행 내내 여권을 가방에서 꺼낸 적이 없는데 당최 보이지를 않으니 귀신이 곡할 상황이다.

  "하.. 환장하네. 진짜 없네 없어."

  허탈하기 짝이 없다. 10년간 비행하면서 여권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던 나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후배들에게 필수 휴대품 관리 잘 하라고 입에 닳도록 말해 놓고선 정작 사무장인 내가 여권을 잃어버렸다니 지난날이 부끄러워진다.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은 캐리어를 대충 정리하고 매가리 없이 집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밤샘 비행 끝나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는데 그놈의 여권 때문에 퇴근길 내내 잠은커녕 마음이 심란하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한번 캐리어를 열어보지만 여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 사태를 회사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하다가 이내 눈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클락 비행 다녀온 ㅇㅇㅇ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 여권을 분실했습니다.."

그 순간 나 자신이 세상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최대한 침착한 척을 하며 어떻게 잃어버리게 된 건지 정황을 설명했다.

  자초지종 상황 설명을 듣고 난 담당자는 "사무장님, 경위서 써서 제출해 주세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마무리 짓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디차갑다.


  여권 분실이 승무원에게 큰 실수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대로 나락으로 가는 듯했다.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 경위서를 써 내려갔다. 수정에 수정을 거쳐 완성된 눈물겨운 경위서를 담당자에게 보내기 위해 사내 메일에 접속했다.

  그때 받은 메일함에 있는 한 통의 메일의 제목을 보고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클락 지점 여권 보관]

  서둘러 메일을 클릭을 해 내용을 읽어본다.

.

.

?????????
뭐야?! 내 여권이 왜 클락에 있어?!



  메일 내용은 이러했다. 비행기 청소하는 조업사가 청소를 하던 도중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우치를 발견했고, 그는 손님이 놓고 내린 짐인 줄 알고 파우치를 클락 지점에 전달해 놓은 것이었다.

  지점 직원은 파우치 안을 확인해 보니 승객 짐이 아닌 이미 클락을 떠난 승무원의 여권인 것을 확인하고는 나에게 곧장 메일을 보낸 것이다.

  아뿔싸.

  메일을 읽고 난 뒤, 비행기에 타서 캐리어를 정리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던 도중 마침 청소 조업사가 내 옆을 지나가야 되는 상황이었고,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 캐리어를 정리를 했던 바로 그 순간.

  그때 그 순간이 여권 파우치가 캐리어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하...'

  평소 서두르는 성격도, 뭘 흘리고 다니는 성격도 아닌데 이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다.

  '그래. 그래도 여권 찾은 게 어디야.'

  그나마 여권이 아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님에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다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설명을 했고 그녀는 약간의 위로의 말을 전했다. 물론 경위서 제출은 변함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클락에 주인 없이 홀로 남은 내 여권은 그다음 날 클락 출발 비행기에 실려 나에게 무사히 전달이 되었다.



사진 출처 Shutterstock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회사에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까지 상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AI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업무적으로도 조직생활에서도 말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연차가 쌓였을 때 벌인 실수는 주변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큰일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속상한 마음에 직장 동료, 가족,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비행을 하면서 여권 분실 말고도 때때로 실수를 저질렀다. 순간은 피하고 싶지만 도망칠수록 나 자신은 더 초라해지는 경험을 했다. 이제는 실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능숙하지 않아도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그 결과 인생 경험 능력치가 또 한 번 올라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부디 실수로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지 말길..!



PS. 그 당시 승무원으로서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끙끙거렸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게 된 추억이 되었어요. 물론 저의 실수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었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지나간 일 붙잡고 있어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요ㅎ

다만 이 사건 이후 후유증으로 병적으로 여권에 집착하게 되었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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