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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Jul 04. 2024

승무원이 승객으로 비행기 탔을 때

직업병

  승무원으로서 비행만 하다가 여행으로 비행기에 타는 날이 오기라도 하면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아싸~ 편하게 가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행기 타는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마음 편하게 쉬지 못한 채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었기에 이번에는 편하게 누려야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비행기에 올라타면 '숨겨진 승무원' 역할을 혼자 자처하곤 한다.



1. 미어캣 모드

  비행기에 타면 가장 먼저 하는 것. 바로 비행기 기종 맞추기이다.

  '이건 보잉이네, 에어버스네.'

  처음 타보는 기종 이기라도 하면 눈으로 여기저기 탐색하느라 바쁘다. 좌석 주머니에 꽂혀있는 비행기 안전 가이드 안내문을 들춰보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기종 공부를 하기도 한다.

  본격적인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시작되면 다른 항공사 식사 메뉴는 뭔지, 서비스 방식은 어떤지 나도 모르게 살피게 된다. 승무원의 서비스 태도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벤치마킹하여 실제 내 비행 때 적용해 보기도 한다. 반대로 엉망진창 서비스를 하는 승무원을 보면 사정이 있어서 그러겠지라는 마음과 꼰대스러운 마음이 공존한다.

   지금까지 겪었던 서비스 중 가장 충격적인 승무원의 서비스가 있었다. 승객에게 스낵 봉지를 휙-하고 던지며 엄지척을 날린 외항사 승무원이 있었는데, 이런 태도로 한국에서 서비스했다가는 어쩌면 뉴스에 나올지도 모른다(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비행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복도를 돌아다닐 때면 은근슬쩍 갤리 구경을 하고 오기도 한다.



2. 승객 콜 울릴 때마다 움찔

  '띵동-' 하고 승객 콜이 울리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어느 좌석인지 찾게 된다.

특히 객실 복도 지나갈 때 승무원을 부르기 위해 누군가 손을 번쩍 들면 나도 모르게 승객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몸이 움찔거린다.

  서비스로 한창 바쁜 시간에는 여기저기 승객 콜이 눌려져 있는데 한참 동안 콜 버튼이 켜져 있을 때에는 괜히 초조해진다.

  '저 손님 한참 기다린 것 같은데 내가 가서 도와주고 싶다..'

  승무원을 하기 전에는 승객콜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이제는 승객콜 소리가 비행기에서 휴식을 취할 때 방해 요소가 되었다.



3. 화장실 정리

  비행기에서는 웬만하면 화장실을 잘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다 가게 되면 승무원들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어지럽혀진 화장실을 정리하고 나온다. 세면대 물기를 닦고 두루마리 화장지 삼각 접기까지 말이다.

  지난번 어떤 항공사에서는 내가 화장실을 쓰고 나오자마자 승무원이 정리하려고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이때 그 승무원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1. 뭐지?.. 용변 보고 손 씻지도 않았나?

   2. 어??.. 승무원 스멜이..

  (TMI. 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집 화장실에서도 삼각 접기를 한 적도 있다)



4. 벨트 정리

  승무원 교육받을 때부터 버릇처럼 해오던 '벨트 정리'.

  비행기 자리에 앉고 떠날 때에는 좌석 벨트를 영상과 같이 ‘X’로 정리를 한다(사진 참고).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이때 놓고 내리는 물건은 없는지 주변을 살피면서 벨트 정리를 하고 나온다.

  굳이 그렇게까지?라고 생각이 들 수 있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습관이 배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고자 눈을 감아본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콜 버튼 소리, 승객이 승무원과 대화하는 소리, 기내 방송과 같이 비행 일련의 과정들이 내 귀와 눈에 들어온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신경을 끄기위해 애써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남은 비행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반도 안 갔다.

  '이럴 바엔 그냥 비행을 하면서 가는 게 낫겠어.'라는 생각까지 든다.


  승무원에게 수고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 식사 메뉴 선택할 때에는 '아무거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다반사이고, 추가로 서비스를 하는 경우에는 '괜찮아요.'라고 할 때도 많다. 어쩌다 정말 필요한 게 있을 때에는 콜버튼을 누르는 대신 갤리로 직접 찾아가 승무원에게 요청한다.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받는 것은 나의 권리가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이번에는 진짜 편하게 쉬면서 가야지.', '먹고 싶은 와인이나 맥주 달라고 해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타도 온전히 비행을 즐기고, 서비스를 누리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증상들이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승무원들이 나와 같은 건 아니다. 하지만 승무원이 승객으로 비행기에 탄 순간, 승무원을 배려하는 마음은 비슷하지 않을까?

  승무원을 그만두어도 비행기를 편하게 탈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나도 비행기에 타면 무뎌지고 싶다.



PS. 그런데 저와 정반대의 태도로 비행기에 타는 승무원도 있어요. 마치 시집살이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더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에요. 같은 승무원끼리 그르지므르 진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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