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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고수정 Oct 24. 2023

의장대 사열을 받는 법

걷기 운동 중 가로등이 켜 졌을 때

 "소~는 누가 키우냐고"

 개그맨 박영진의 유행어다. 나의 주된 업무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지만, 7살 아이가 유치원에 있는 시간만은 교사들이 소(아이)를 키우고 있다. 오전 8시~오후 4시 30분까지다. 이 시간은 내 개인 시간으로, 휴식이나 노는 시간이 아닌 혼자 가사(업무)를 보고 자기 계발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가 하원해서 잠들기 전까지는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은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는 황금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봄부터 걷기 운동을 하고 싶었다. 매주 1회 요가 교실에 다닌 덕분인지 신체가 더 많은 운동을 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넌지시 주었다. 그렇다면 몇 시에 운동할 것인가. 당연히 황금 시간에 해야 한다. 동네 산책로를 50분~1시간 정도 걷기만 하는 것을 운동이라 부를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주 1회 걷기 운동이 내 우선순위 상위에 올라갔다. 요가 수련이 없는 날, 비가 오지 않는 날, 체력이 바닥이지 않은 날, 수강할 강의가 없는 날 등을 잘 골라야 했다. 주로 오전 시간대였다.     


 그렇게 1~2달 정도 꾸준히 걸어왔다. 어느 고즈넉한 주말이었다. 다가오는 한 주의 날씨를 보니, 공교롭게도 며칠 동안 비가 올 예정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번 주에 걷기 운동 못하는 거 아냐?’ 이 생각이 들자 오늘이라도 운동화를 신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이 오후 6시가 넘을 때였나, 캄캄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으려면 지금 당장 현관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창밖에는 노을빛이 노랗게 퍼져있어 대낮같이 밝아도 땅거미가 내리면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진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주말 저녁의 아이 목욕 담당은 남편이었기에 어떤 미안한 기색 없이 운동화 끈을 다잡았다. ‘소는 누가 키우냐’는 걱정 없이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는 통보만 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문을 열자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기온에 다소 놀랐다. 오전에 운동할 때도 끝날 때쯤엔 날씨 자체의 더운 기운이 있는데, 이 저녁의 공기와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오를 향해가는 온도와 저녁을 향해 가는 온도의 질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는 포근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있었다.      


 코스는 평소와 똑같았다. 산책길이 익숙해서인지 운동할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 때문인지 유독 하늘을 자주 보게 됐다. 구름이 별로 없어서 하늘의 색 변화가 눈에 잘 들어왔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노랗던 빛이 하얗게 넓어지면서 엷은 푸른색으로 변신하는 게 신비로웠다. 또 10분 후에는 이전보다 짙어진 파랑 빛이 하늘을 물들였다. 미세먼지가 없어서 그런가, 또 10분 후 파랑이 진한 쪽빛으로 변할 것을 상상하니 기분도 한결 싱그러워졌다.      


 그때였다. 대형 아파트 단지 앞의 가로등이 일제히 빛을 밝혔다. 띠디딕 딕딕 드르륵. 장관이었다. 단지 앞 도로는 4차선이었고, 도로를 따라 가로등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져 있어서 마치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듯했다. 등이 켜지는 순간은 예쁘다고 하기엔 경이로웠고, 반갑다고 하기엔 낯선 느낌이 컸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굉장한 고마움을 느꼈다. 어린아이를 잘 키우려는 나의 노력에 신들이 손뼉 쳐 주는 것만 같았다.     


 출산한 이후 수년간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대에 주부인 나는 99% 집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름보다 낮이 짧은 한겨울 5~6시쯤에야 아이의 체육교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로등 빛을 봤으려나.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만약 밖에서 봤다면 평일이나 주말 저녁 가족이 외식을 했을 때 정도일 텐데 본 기억은 전혀 없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9시 이전에 잠을 재우는 일이다. 아이의 수면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일찍 귀가하고 목욕 시간을 지켜왔다. 명절 때도 예외 없었다.      


 말하자면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시간은 한창 부지런할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것도 있겠지만, 가로등 불빛의 아름다움 따위는 안중에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던 게다. 단 하루 ‘저녁 시간의 걷기 운동’이 내게 가져온 것은 단순히 체력증진만이 아니었다. 늦은 오후의 노을이 아름다워서, 지구가 자전하면서 보여주는 빛깔이 아름다워서, 작은 우연에도 감사할 줄 아는 나를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다.     


 이제 여름이 되어 주 2회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신들이 또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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