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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고수정 Jun 07. 2024

빨래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

- 혁신의 등장

 세탁기와 건조기를 합친 ‘세탁건조기’도 출시되는 마당에 나는 결혼 10년 차에 건조기를 만났다. 출산한 이후에도 베란다에 볕이 잘 들어와서 빨래를 말리는 데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다 이사를 하게 됐다. 깔끔이 남편은 6단 접이식 건조대가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수건에서 냄새도 난다며 건조기를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신문물이 생긴 뒤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오늘 햇빛이 얼마나 많은지 보려고 날씨를 찾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다.      


 주부의 일상에서 빨래 말리는 걱정 하나 줄었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큰 혁신일까. 혁신의 뜻을 찾아보니 ‘묶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라고 적혀있다. 과연 혁신이다.      


 한 번은 요가 가는 날 아침이었다.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간 이전에 세탁이 끝나도록 통돌이 가동을 시작했지만, 시간 계산을 잘못한 건지 현관을 나서야 할 시간에도 세탁종료 알림음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지각했다. 탈수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젖은 세탁물을 너는 데 이토록 오래 걸릴 줄 몰랐다. 머릿속으로는 10분이면 충분하겠지 싶었지만 막상 그게 아니었다. 부피가 큰 옷 몇 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이 옷을 포함해 작은 옷들도 많고 양말도 많았다. 그러면 옷감을 털어 너는 횟수가 많아지고 건조대에 크기 별로 자리를 지정하는 것도 나름 노고로 느껴지게 된다. 남편의 긴팔 셔츠와 긴바지까지 많아 옷감들이 엉켜있는 수준도 심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요가 수련 50분 중 20분이나 늦은 수강생이 되었다.  


 만약 건조기가 있었다면? 한 무더기의 젖은 빨래를 통째로 욱여넣고 버튼 2~3개만 조작했으면 됐다. 오전 운동을 충분히 마무리하고 건조 걱정 없이 하루를 밖에서 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날 오후에 글쓰기 수업 한 번, 독서토론 모임 한 번, 그리고 도서관에 예약해 놓은 도서 대출 같은 일들을 여럿 할 수 있다. 건조기 등장 이후의 평일 동선이 실제로 이렇다. 한마디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 집 학생을 과학 교실에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집에 함께 돌아올 때 30분이라도 놀이터에서 놀도록 해줘도 빨래 걱정 따위는 머릿속에 없다. 말하자면 여유 있는 엄마도 된다.


출처:언스플래쉬


 과장을 좀 더 보태면 건조기는 학위 하나 정도 취득할 시간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물론 공부도 쉬운 게 아닐 터다. 적은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닐 터다. 예습 복습에다 리포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처럼 집중해서 공부에 열을 올려야 하는 기간이 반드시 있다. ‘티끌 모아 티끌’일까. 적은 시간 모아봐야 적은 시간이랴?     


 건조기가 주부의 시간을 아끼게 해 준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약 내 단독저서가 출간된다면, 감히 건조기의 역할이 컸다고 단언한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내게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편리가 큰 효용이 될 수 있다. 건조기를 개발하신 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남편도 감사합니다.)     


 간혹 건조기 사용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먼지 털기가 귀찮을 수 있다. 오죽하면 아이도 ‘왜 이렇게 먼지 청소한 게 자주 보이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매번 먼지함을 비우는 게 번거롭지 않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열교환기를 청소하는 것도 전혀 귀찮지 않다. 이점이 훨씬 많기 때문이리라. 빨래하는 사람의 기쁨은 여러 가지인데, 슬픔은 너무 사소하구나.     


 가전업계 종사자 가운데 누군가 이 글을 보신다면 좋댓구알(좋아요 댓글 구독 알림 설정) 해 주시기를, 널리 추천해 주길.


[인천중앙도서관 중앙저자학교2기 '서로고침'수업 참여작]


출처: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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