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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고수정 Aug 29. 2024

먹고 도망

(RUN)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해야 할 일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혼돈의 한 달이라고나 할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준비해야 할 것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몸에 맞는 책가방 하나 준비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학교는 반 편성 공지도 늦었고 담임교사가 지정해 주는 학용품 준비물 리스트도 입학식 당일에나 받을 수 있었다. 꼼꼼하게 하나하나 챙겨나가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둘째 주에는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 신청 기간이라고 하니, 그것도 빠르게 결정지어야 했다. 셋째 주, 넷째 주에도 담임의 공지 사항이나 학교 차원의 알림이 뜰 때마다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차근차근해 나가면 어려울 것 없는 과정들이었지만, 신입 학부모에겐 얼떨떨한 시간이었다.    

 

 사실 입학 전에도 3월의 신학기 분위기는 나도 익숙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이 때 진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특별 요인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학교 교실은 자신의 책상과 의자가 정해져 있는 게 다른 점이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좌석이 뒷자리로 배치되면 칠판 글씨가 잘 보일까 하는 우려의 마음이 들었다. 시력 발달 정도를 꾸준하게 점검해 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영유아 발달 검진 때도 몇 차례 시력검사가 있었지만, 최근 6개월~1년 사이에 안과를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이의 시력이 부계 유전이라면 생활 습관과 상관없이 분명 정상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 움큼의 걱정을 손에 쥐고 3월의 어느 날 안과에 들어섰다. 갑자기 남편이 태블릿을 새로 사 왔던 날이 떠오르며, 아이가 얼굴이 들어갈 것처럼 화면 안을 바라보는 장면이 머리에 찍혔다. 캠핑 갔을 때 텐트를 치던 어른들을 기다리며 유튜브 영상에 빠진 아이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지난 4년간 코로나가 창궐한 특별 상황까지 고려해 보자. TV나 스마트폰을 모두 포함한 스크린 시청 시간은 해마다 늘었을 것이다. 나는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인가? 아니다. 지난 몇 달 사이 아이의 친구들 몇 명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한 사실은 불안의 최정점을 찍게 해줬다. 자세히는 몰라도 만 6세에 0.8까지 시력이 나오지 않으면 정밀검사 권고 대상인가 보다.  

   

출처: 언스플래쉬

 우리 집 학생이라고 예외가 있을까. 시력 1.0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제발 안경을 쓰지 않을 정도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 진료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호사는 시력검사와 함께 망막 검사도 진행한다고 했다. 성장기에는 안구의 크기도 주기적으로 봐 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말이다. 소아안과의 대기실에는 보호자는 물론 갓난아기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와 나는 순서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다행히 시력도 1.0이었고, 의사의 진료실에서도 특이소견 없이 진찰을 마쳤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가벼운 나머지 집까지 직진했다.


“OO 안과입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찾고 계신 데 어디 계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또르르 내리는 게 느껴졌다. 검사란 검사는 다 해 놓고 수납을 안 한 채 귀가한 것이다. 한마디로 먹튀였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하며 계좌번호로 보내겠다고 했다. 상대는 수납보다는 다음 예약날짜를 잡는 게 더 중요했다는 뉘앙스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다시 내게 연락해서 5만 원 정도의 금액을 현금영수증 처리해 주겠다고 안내해 주었다. ‘먹고 도망’에게 이렇게 친절할 것까지야.     


 어느새 4월이 됐다. 한 달 만에 담임교사는 교실의 자리 배치를 새로 하신다고 했다. 한 달간 네, 다섯째 줄에 앉은 학생들 먼저 앞자리 선택권을 주는 뽑기 방식이었다. 우리 아이의 경우 4월 한 달간은 맨 뒷줄에 앉게 되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여서. 잠시 동안 먹튀 범죄자 신세였지만, 시력 검진 하기를 정말 잘했다.



[인천화도진도서관 ‘글쓰는 저녁’ 프로그램 참여작]

출처: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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