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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고수정 Mar 14. 2024

난생처음

(feat. Life is cool)

난생처음 MRI 촬영을 했다. 요통이 심해 몇 주간 침을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는 자기 공명 영상장치를 가리키는 말로 자기장을 이용해 인체의 단층상을 얻을 수 있는 영상법까지 일컫는다. 기계는 하얀색이었으나 나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낯설고 무서웠다. 그때 외국 가수 sweetbox(스위트박스)의 노래 'Life is cool'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후렴 부분의 가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라이프 이즈 쿠울 워우어~ 라프즈 쏘 쿨."  


촬영은 25분이나 걸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노래를 생각하니 지루함이 한결 나아졌다. 명곡이긴 명곡이었다. 캐논변주곡을 베이스로 하는 멜로디를 돌림 노래처럼 흥얼거리다 보니 기분도 나아졌다. 동시에 이 노래가 왜 떠올랐는지 궁금했다. 2005년인가 2006년인가 내한 공연에 갔던 기억이 났다. 어머, 거의 20년 전. 그러니까 그 옛날에 알았던 노래가, 최근에 불러본 적도 없는 노래가 왜 스쳤을까.


MRI 기계가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소리는 엄청 크다고 한다. 포클레인이 콘크리트 땅을 파는 정도랄까? 그래서 나는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음을 듣지 않으려고 아무 노래나 불러봤는지 모르겠다. 그러기엔 1주일이 지나도록 일상에서도 병원에서도 이 노래가 계속 맴도는 이유가 궁금했다. 당최 모르겠다. 일단 캐논변주곡의 다양한 버전을 검색해 들어봤다. 역시 음악도 좋고 악기들의 매력도 신선했지만 마음속에 들어온 원인은 찾지 못했다.


이번엔 원곡 'Life is cool'을 재생했다. 영어다. 후렴부는 익숙하지만 나머지는 굳이 찾아본 적 없었다. 누군가 해석해 놓은 가사를 훑어보았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진리라고 보자면 또 진리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게 전달되는 버전도 있었다. 시라고 생각하고 주욱 한번 적어 보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대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인생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에요. 당신이 바라는 삶은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해요.


필사를 해 보니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선택한 대로 산다는 걸 기억해야 해' 이 부분에서 미묘한 울림이 일었다. 아파서 난생처음 MRI를 찍는 상황도 내가 선택한 인생의 결과였다. '내 선택'이라는 걸 노래가 알려주려고 한 것 같았다. 무의식이 현실의 내게 깨달으라고 외쳐주는 말은 지금 삶이 당신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라는 걸 나는 놓치고 있었다. 출산하던 해에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산후조리를 잘 못한 건지, 피 끓는 청춘인 줄 착각하고 무리한 탓인지.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다니며 침도 맞고 추나치료를 받아왔다.


요통이 심할 때마다 내가 왜 애를 낳아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많이 원망했다. <엄마됨을 후회함>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목의 책도 읽어봤다. 위로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내게 엄마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준 사람이 단 한 명 없었다는 억울했다.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다. 임신하기 전 수십 년간 아이를 안 낳아도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지만 않았더라면 내 디스크는 멀쩡했을 텐데. 책 제목처럼 나도 후회했다. 비혼족이나 딩크족부럽다. 적어도 나 같은 추간판 탈출증(흔히 말하는 '디스크')의 고통은 없이 살 수 있을 테니까.


지난 4년 간 한 번도 한의원을 찾지 않을 만큼 내 허리는 건강했다. 그러다 MRI를 찍었고 sweetbox의 노래를 다시 만났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바라본다. 아플 때는 치료에 집중하고 또 한 발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니까.


갑자기 다 받아들여진다. 제발 아이의 졸업식에만 갈 수준으로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억울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와 아이의 삶은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를 유치원 졸업식 사진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당연한 욕심(?)이 내 안에 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삶은 멋졌다. Life is cool.


졸업식 진행 시간을 먼저 확인해 봤다. 과연 이 허리 상태로 50분이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걱정됐다. 그날 나는 예상에 없던 '최고의 부모님상'을 받게 되었다. 내가 뭘 했다고?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우리 유치원에 아이를 2년 이상 보낸 부모들이 수여 대상인 듯했다. 그래도 나는 그날 그 시간에 졸업식장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상을 받을 만했다. 스스로 선택한 삶에 격려받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아이의 입학식날에도 우리 유치원은 축하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내가 선택한 삶, 결혼하고 육아하는 이 인생은 예상 못한 상장을 받는 일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불평만 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받을 영광을 기대해 보게 된다.


출처: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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