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추억이 가지고 있는 힘
그리 오래 산 인생이 아님에도, 내 삶에는 참 많은 굴곡이 있었더랬다. 누군가 나의 인생을 어떤 장르의 영화로 만들고 싶으냐는 질문에 어릴 적의 난 ‘로맨틱 코미디’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로맨틱 코미디와는 영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은 아니라 할 것이다. 으레 소설 속 주인공에게 비참하고 괴로운 시작과 고난이 있지만, 끝내는 조력자가 함께하고,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는 것을 보며 나도 이 길 끝엔 행복하지 않을까, 울면서 바랐던 나날들.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도, 감동물도 아닌 어둡고 축축한 나의 이야기에는 늘 울고 있는 내가 있었다. 희망을 가져볼 만하면 기다렸단 듯이 추락만 하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은 감옥에 갔고, 그 이후로 나는 감정을 잃었다. 그를 놓지 못해 아프도록 사랑만 했던 그 시기에 나를 버티게 한 건 그와 함께한 고작 100일 즈음되는 기간의 기억들이었다. 살면서 고작 100일 행복했다고 하면 어떻게 버틸까 싶지만, 그것만으로도 붙들고 버텨지더라.
세상을 잃은 그와, 그를 잃은 나의 이야기에 코미디라고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써 나의 이야기를 성장물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 기억하나 움켜쥐고 다시 살아보겠노라고 부단히 노력했다. 사랑에 대한 단어들로 점철되어 있던 내 인생이 성실과 인내에 대한 말들로 바뀌어 갈 즈음 난 영영 그를 놓았다.
”난 너한테 이렇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넌 나한테 네 이야길 하지 않아.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
그가 내게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애쓴 모든 것들은 사실 그 하나만을 위해서였는데, 잘 시간조차 아껴가며 일을 하고 공부만 했다고, 그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그 모든 시간들 중 단 한 조각도, 순수하게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해서 쓴 적이 없었는데도 그는 내게 화를 냈다.
‘아, 더 이상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의 노력은 이 사람에게 닿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비로소 나는 그를 놓을 수 있었다. 씁쓸하고도 외로운 결말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했다. 실은 내가 대학에 간 건 조금 더 안정적인 위치에 자리 잡아서, 너를 돕고 싶어서였다고 말을 할 사람이 더 이상 없는데도. 늘 하던 대로 최선은 다했으나 목적지를 잃은 배는 공허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더는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없게 된 나는, 그저 모두를 아껴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해 왔던 것 같다. 그게 그와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이라 여기며.
고작 반년만에 건강검진 이상 진단을 받기 전까진.
신장에 큰 혹이 있다고 했고, 자궁 쪽은 조직검사를 받아보라고. 그쯤 되니 조금 무서웠다. 나를 위해 산 시간이 없는데, 생각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내 생각보다는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꾸준히 기록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지난 몇 달의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 시간 속에 상처받는 일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언젠가, 혹은 당장 내일이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많이 웃고, 많이 울면서.
“혹시라도 계속 하혈을 하거나 하면 바로 다시 병원에 오셔야 해요. “
당장 어떤 조치를 하게 되지는 않았으나, 내가 기억하는 의사의 당부였다. 내가 이제라도 건강을 관리하고 나를 조금 더 챙기는 사람이었다면 좋았겠으나, 이미 한 번 깊은 늪에 빠져본 나였으니 건강과 나의 시간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힘껏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는 양초처럼 살았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나를 녹이고.
그리고 결국 하혈이 멈추지 않아 다시 병원 예약을 잡으며, 생각이 많아진다. 다시 한번 내가 어둠 속에 잠식당한다면. 정말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내 죄라 여기고 억울해하지 않고 싶었으나 실은 많이 억울하다. 후회도, 아쉬움도 없으나 억울하다고는 말하고 싶다. 왜 내 삶에는 이다지도 행복이 허락되지 않는지. 왜 내게만큼은 끝없이 견디고 인내하는 삶만이 허락되는지.
다시 나는 많이 억울할 테고. 버티기 위해 다시금 내 죄라 여기게 될 테고. 이번엔 나를 위해 살아본 짧은 일 년간의 기억을 붙들고 버티게 될 것이다. 그걸로 버텨지냐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버텨지더라. 그래, 한 번 버텨본 거 두 번이라고 못 버틸까. 결국은 또 지나가리라.
오늘은 정말. 취하고 싶고, 많이 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