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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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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 Sep 03. 2023

여름, 안녕

<여름의 빌라>, <바깥은 여름>,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이번 여름은 내게 도전의 계절이었다. 평소 하지 않던 낯선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아가 책을 빌려 읽고, 궁금하지만 도전해보지 못했던 빠지에도 다녀왔다.

 도전의 이유는 단순히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용기를 가져서가 아닌, 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좋은 경험도 있었고 힘든 경험도 있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경험은 계절에 어울리는 다양한 책들을 읽어본 것. (빠지는..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물은 보는 것만 좋아하기로 했다ㅎㅎ)


 원래 내게 '여름'은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살이 타들어가고, 땀이 줄줄 흘러 불쾌하고 힘이 빠지는 계절이었다. 밖에 있으면 더위 먹어서 녹아내리고, 실내로 들어가면 에어컨 때문에 추위에 덜덜 떨고, 장마기간이 오면 비가 쏟아져서 습하고 찝찝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올여름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여름은 유난히 하늘이 예쁜 계절이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여름이 조금 좋아진 것 같다.




내가 바라본 서울 여름의 하늘 (모두 무보정이다. '여름'필터가 들어갔나? 너무 예뻤던)








1. 여름의 빌라_백수린

  단편이 여럿 수록된 책이다.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과는 달리 책의 표지부터 내용까지 쓸쓸한 겨울이 생각나곤 했다. 이 책에서는 특별히 강렬한 사건들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대신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모든 작품들의 주인공은 (해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관계를 대한다. 그리고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그 모습이 평소 나의 모습과 겹쳐 보여 주인공에 이입된 채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여름의 빌라> 속 주인공 주아가 그랬다.


  <여름의 빌라>에서 작품의 배경은 독일이다. 주인공 주아의 부부가 인연이 있는 독일인 한스네 집에 초대받아 여행을 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그곳에서 두 부부는 수상가옥에서 바나나를 팔고 보트를 젓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보러 간다. 독일 부부가 그 모습을 보며 낭만을 느끼고 행복해한 반면, 주아의 남편 지호는 그들이 자신들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라 말하며 불편감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런 남편에게 한스는 도리어 '그런 삶의 방식은 그들의 생존 방식이며, 그 방식 덕분에 먹고살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때문에 그런 그들의 삶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야 말로 그들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결국 지호는 '그들의 삶은 홍수로 인해 침수된 것이며 적어도 그들의 가난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낭만이니 평화니 떠들어서는 안 된다.'며 분노를 터트리고 만다.

 주아는 그 속에서 지호처럼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스의 손녀가 캄보디아 소년에게 보여준 둘 사이의 '선'을 지우는 행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렇듯 주아의 조심스럽지만 따뜻한 태도가 그 마음들을 녹여낼 수 있기를. 작가님의 믿음처럼 이해와 사랑이 아직 세상 속에 많이 남아있길 바란다.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여름의 빌라>





2. 바깥은 여름_김애란

 마찬가지로 단편이 여럿 수록된 책이다. <여름의 빌라>는 쓸쓸함이었다면, <바깥은 여름>은 조금 더 깊은 슬픔이었다. 배우자, 연인, 자식, 반려동물을 잃고 난 후의 이야기들. 그중 첫 작품인 <입동>이 가장 읽기 힘들었다. 누구나 울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유난히 '중심'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중심은 아니나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며 안도하는 모습(입동), 서울토박이인 주인공이 지방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러 내려가며,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심란해하는 모습(풍경의 쓸모), 많은 소수언어가 소멸하고 그 속에서 중앙을 지키기 위해 소수언어를 쓰는 이들을 박물관에 가두는 모습(침묵의 미래). 많은 사람들이 '중심'에 속하고 싶어 하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순간 뒤쳐졌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모두가 중심에 몰려있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위나 아래, 혹은 오른쪽이나 왼쪽에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물론 나도.

 

  <침묵의 미래>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꽤 인상적이었는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올여름 영화화된 작품이었다. 시간이 되면 영화를 본 후 책과 비교해 봐도 좋을 듯하다.


-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침묵의 미래>
-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가리는 손>





3. 너무나 많은 여름이_김연수

 어쩌다 보니 세 권 모두 단편집이다. 이 책의 경우 작가님이 낭독회에서 읽었던 작품들을 모아둔 만큼 꽤 짧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에는 함께 할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안내되어 있으니, 읽기 전에 플레이리스트부터 준비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나는 아직 음악과 함께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상실'이라 말하고 싶다. 예기치 못한 사고, 전염병 등의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 읽는 내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슬픔에 잠겼던 그날의 사고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힘들어하고, 견뎌내고, 받아들이고 결국 다시 살아갈 수 있었는지. 그 삶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이 따뜻했다. 사고를 겪었다는 이유로 불쌍해하거나 안쓰러워하지 않고,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응원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거기 까만 부분에>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마지막 작품이자 책의 제목인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마치 에세이 같은 느낌이었다.  


 쉽게 읽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좋았지만 또 어려웠다. 김연수 작가님의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유난히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라고 연구원은 말한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요." <거기 까만 부분에>








 올해 읽은 '여름'의 제목을 가진 책들은 어째서인지 모두 슬펐다. 오해를 이야기하고, 상실을 이야기하고, 갈등과 이별을 통한 성장을 이야기한다.


 윤슬이 생각났다.


 끝없이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면 어두컴컴하고 차가울 것이다. 그러나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그 표면은 너무나도 찬란하다. 깊은 바닷속에 잠겨있던 이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와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그곳을 바라보기까지. 그 과정을 그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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