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당신에게 영감을 줄 지도 모르는, 첫 번째 이야기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도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나처럼 평범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끄집어냈을 때, 그 형상은 당시보다 희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 큰 사건을 겪은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부분이고,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사건도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매우 짧은 시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경험을 직접 겪은 그때, 나에게는 가장 선명한 현재였다는 것이고 그런 경험들이 모여서 현재의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부터 그 경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보려고 한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사람들이 교훈을 얻는다는 꽤 거창한 비유를 가져다 놓는 것 같지만, 내 하잘것없는 경험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금 이곳에서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다.
더불어, 내가 공개적인 공간에서 적어낸 글을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도 뭔가 공감할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기회의 계기가 혹시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감도 있다.
가장 처음으로 꺼내는 내 경험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가장 어울리는 내용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연습장과 볼펜에 엄청난 돈을 썼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저축이라는 걸 배우고 문구류를 살 돈을 통장에 넣었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 정도로 엄청난 돈을 썼다.
돈을 연습장과 볼펜에 그렇게 많이 쓴 이유는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내용인데, 바로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그라미와 선으로만 그려진 캐릭터(졸ㅇ맨)가 인터넷에서 유행처럼 돌았다. 플래시(가장 기초적인 컴퓨터 디자인 그래픽)를 이용해 움직이는 만화가 컴퓨터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때다. 만화라고 하기에는 지금 와서 보면 조금 많이 낮은 수준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TV에서나 볼 법한 만화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만화가 새로운 에피소드를 들고 오는 때를 목빠지게 기다렸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동그라미와 선으로만 그려진 캐릭터'라는 지점에서 나는 내가 직접 그릴 수 있다는 결론에 닿았다. 물론 컴퓨터로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으니 불가능했고, 직접 그리기에도 어렵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직접 그려보자라는 생각을 했고, 이것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학교 앞 문방구로 직진했다.
처음에는 줄이 없는 연습장과 검은색 볼펜만 사서, 내가 칸을 직접 그리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걸 그리기 시작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만화의 형태로 스토리를 입혀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최초로 그린 만화 내용은 허무한 스토리였다. 당시 허무개그라는 게 유행했는데, 그 시류를 맞추어서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내용을 그려낸 것인데, 독자의 니즈를 미리 예측하고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과거의 내가 조금 웃기게 보이긴 한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마케팅을 몸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초 스토리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삼국지였다. 그때 내가 즐겨했던 게임이 삼국지였고, 60권짜리 삼국지 만화를 그리고 있었으며, 정해져 있는 스토리에 동그라미와 선에 갑옷만 더 그리면 되니 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맨 처음 내 독자가 되어준 사람은 그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두세 명이었는데, 내가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으니 독자가 자연스럽게 늘기 시작했고 빨리 다음 편을 내놓으라는 연재 압박까지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는 수업시간에 내가 그린 만화를 돌려 읽다가 걸려서 누가 그렸냐는 선생님의 불호령에 고개를 숙이고 팔을 드는 상황이 계속 생겼다는 점이다. 온화하던 선생님이라도 본인 수업 때 애들이 (하찮은) 만화를 보면 얼마나 화가 나실까란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래도 독자들의 관심이 좋았는지, 나는 그들의 만족감을 더 올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만화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노트와 펜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노트는 무지 연습장에서 줄이 있는 하드커버 노트로(줄이 있으면 칸과 그림 크기 설정이 한결 편리하다), 펜도 검은색 볼펜에서 5색 볼펜, 심지어는 한 자루에 몇천 원 하는 볼펜을 사게 되었다. 그림 그리기에 좋은 펜을 찾으러 다녔고, 국산 펜이 좋은지 외제 펜이 좋은지 직접 사서 써보게 되었다. 볼펜 똥(?)이 많이 나오는지, 번지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체크하는 등 펜을 판단함에 있어 한층 더 엄격해졌다.
이렇게 만화를 그리고, 휴재를 했다가 다시 그리고 했던 기간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이다. 무려 4년간 꾸준히 만화를 그렸고, 그걸 그리는 동안에는 혼자서 엄청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 연습장 수십 권, 펜도 백 자루를 넘게 산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명분으로 만화 그리기를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때만큼 몰입했던 적이 지금까지 있을까 하면, 찾아내기 쉽지 않다.
첫 글의 주제로 이 기억을 쓰는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이유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만화에 손을 뗐고 지금은 전혀 관련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기억이 매우 강렬했던 것 같다. 자랑으로 보일 수 있지만(사실 자랑이 맞다), 생각보다 친구들은 내 만화를 많이 좋아해 주었고 다른 반에서도 내 만화를 보겠다고 빌려간다거나 다음에는 어떤 내용으로 그려달라는 요청도 듣곤 했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해 최근까지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 기억이 문득 떠올랐고, 성공한 사업가가 과거 힘들게 초석을 다졌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뿌듯해하는 것처럼 이십 여 분을 회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답은 아닐 수 있으나 적어도 해답이 될 수 있는 결론을 찾았다.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남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구나.
브런치가 되든, 블로그가 되든 앞으로 글을 좀 더 꾸준히 써보려고 한다. 내용은 나 스스로를 제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신변잡기적인 내용부터 내가 잘 아는 내용까지 다양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또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 점검해 나가고 개선해 나갈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다짐을 쭉 적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것이 어쩌면 현재의 나에게 삶의 활력을 다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오랜만에 보면 더 반가운 것처럼 말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던 과거의 그 경험이, 온갖 질문에 둘러싸인 현재의 나에게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