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도 그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있다.
"아티스트로서 저는 스타일을 개발하고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스타일은 그저 활용하는 무언가일 뿐이었습니다. 하드 록이든 펑크든 상관없었고, 특정 시점에서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적합한지 여부만 중요했습니다. 제가 한 면에서 다른 면으로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도록 하는 대중의 인식이 저에게는 항상 필수적이었습니다."
“As an artist, I was never interested in developing and having a continuum in style. For me, style was just something to use. It didn’t matter to me if it was hard rock or punk or whatever, it was whether or not it suited what I was trying to say at a particular point in time. It has always been essential to me that my public perception was such that I’d be left free to kind of float from one thing to another.”
- Music Connection, 1995
데이비드 보위는 예술 영역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방면으로 활동한 아티스트였습니다. 이러한 보위의 자유로운 사유에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보위가 유명해지기 전까지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경험이 이후의 음악적 행보를 형성하는 데에 중심적 사고로서 작용하였습니다.
보위는 스스로를 그렇게 행복한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고 회상합니다.
보위의 본명은 데이비드 로버트 존슨(David Robert Jone)으로 1947년 런던의 브릭스톤의 (Stansfield Road 40, Brixton)에서 태어났습니다. “보위”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건 1965년으로 당시 데비 존스(Devy Johnes)라는 더 몽키즈의 보컬과 구분되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록스타에게 걸맞는 이름에 탄생한 거죠.
1947년은 세계를 장악할 로큰롤 아이콘들이 다수 탄생한 해입니다. 엘튼 존, 이기 팝, 브라이언 메이 외에도 음악사에 이름을 써내려갈 아티스트들이 태어났지요.
보위의 가족은 그의 어머니, 새아버지와의 이복형제였는데요 이복 형인 테리 번스(Terry Burns)는 그가 예술적 페르소나를 구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재즈, 불교, 오컬트 문화 등을 보위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형에게 영향받아 재즈 음악을 접하면서, 색소폰을 연주하게 되었고, 열정에 힘입어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첫 색소폰은 선물해 주었습니다. 음악적 자아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형 테리는 모계 쪽에서 내려오는 정신분열증이 발현되어서 1985년 기차 역사에서 스스로 생을 거둡니다. 보위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텐데요. 자신의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고, 가족 내에서도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이죠.
당시 보위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이 사건으로 당시 언론은 가족 불화와 스캔들의 빌미로 삼아 보위를 괴롭힙니다.
보위는 사랑하는 형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로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지만, 이 모든 순간은 비에 씻겨내린 눈물처럼 사라지겠죠. 신이 당신을 축복하시길 바라요.
"You've seen more things than we can imagine, but all these moments will be lost, like tears washed away by the rain. God bless you."
- David
이러한 가족 내 정신병력은 보위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작용합니다. 가족 내에서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해 생을 거두는 것을 보았고, 언젠가 자신도 이러한 정신병적인 스펙트럼이 발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죠.
또, 보위가 늘 센세이션 한 외형과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특별한 음악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언론은 그의 가족이 가진 정신 병력을 의심하고 캐물었었죠.
여러모로 보위는 이러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데 스스로 오랜 기간을 싸웠고, 점차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그의 눈이 오드아이가 된 건,중학생 시절인 1962년 캐럴이라는 여자아이를 같이 좋아한 친구인 '조지 언더우드'가 그에게 주먹을 날려 왼쪽 눈에 3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게 되었고 영구적으로 동공확장이 되어버립니다. '조지'는 당시 이에 대해 매우 미안해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보위의 시그니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고 보위의 초기 앨범 커버를 다수 제작합니다.
(앨범: Ziggy Live 1972, The Rise & Fall of Ziggy Stardust, Space Oddity, Hunky Dory)
조지 언더우드의 아트워크는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s://www.georgeunderwood.com/albumcovers
보위는 음악보다는 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요. 스스로를 뮤지션보다는 문학가라고 자주 표현합니다. 그의 가사를 읽어보면 무한한 세계가 담겨있으면서, 리스너에게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선물해주는 걸 보면,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저는 작가입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전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I’m a writer … I really wouldn’t like to make singing a full-time occupation.”
- Melody Maker, 1969
상위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과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심지어 졸업 당시(1963년) 최고점수를 받은 과목이 미술이었다고 합니다. 런던 뉴 본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Nevin D Hirst Advertising 에서 첫 직장을 가졌는데요. 정규직장으로 상업미술가이자 광고제작자의 보조(a junior visualiser and paste up artist)의 직책을 가졌다고 합니다. 록스타가 직장생활을 했단 사실이 새삼 놀랍지요?
시각 예술에서 전문적인 학업을 지속하고 일했던 경험이, 그가 평생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팅부터, 의상, 디자인, 페르소나 구축, 퍼포먼스 표현 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죠.
보위가 보여주는 다방면의 예술 활동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해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