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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수 Sep 19. 2023

별을 헤아리듯 사과를 세는 사람들

하나, 둘, 셋... 는 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글자를 깨치지 못한 사람은 드물게 만났지만, 손가락에 대응하는 정도의 수를 세지 못하는 사람은 여태껏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개수를 세고, 번호 붙이기를 즐깁니다. 하지만 수의 크기가 수백, 수천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헤아리기 버거워지고, 애써 세놓은 수가 맞는지 자신감도 떨어집니다. 그럴 때면 그냥 체념하듯 ‘무지하게 많네’ 하고 히죽 웃어젖히곤 하죠.


저는 남해안의 섬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오래전엔 초등학교 두 개에 인구도 제법 었지만, 지금은 구멍 뚫린 양어장처럼 사람들이 숭숭 빠져나간 탓에 아이들 구경이 힘든 곳입니다. 고향에 내려가 늦은 저녁 호젓한 공터에 나서면, 눈길은 자연스레 밤하늘로 향합니다. 섬 안에 인적은 드문드문해졌지만, 별들은 예나 지금이나 초롱초롱합니다.


저녁노을이 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스러질 무렵, 별크하듯 다가옵니다. 이맘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반사적으로 하나, 둘, 셋... 별을 헤아리게 되죠. 어둠이 짙어지면서 별과 별 사이에 다른 별무리가 솟아나고, 알 수 없는 티끌마저 점등하듯 반짝거리 별 헤아리기는 무척 힘에 부칩니다. 애써 세놓은 숫자에 대한 자신감은 흐려지고, 눈의 초점은 파도치듯 일렁입니다. 더 이상 낭만이 아닌, 눈이 따끔거리는 불편한 작업이 되어 버리죠. 저는 끈기마저 약해, 삼백 개 정도 세다 그만두고는 했습니다.


별 헤아리기를 매번 중간에 포기하기는 했지만 궁금증은 남았습니다. 쏟아질 듯한 저 별들은 도대체 몇 개일까?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더니, 우리가 사는 지구 북반구에서 사람이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최대 3,000~4,000개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체감은 다르겠지만, 생각보다 적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줄 알았거든요. 최소 수 만개 정도.


현재 제 직업은 손해평가사입니다. 국내에 5천 명가량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 생소한 직업에 속하는 편입니다. 손해평가사로서 맨 처음 맡은 일이 과수원에 매달려 있는 사과 개수 조사였습니다. 처음 사과를 세면서, 고향 하늘의 별을 세던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크게 다른 점이라면 별 헤아리기는 낭만이요 자유이지만, 사과를 세는 것은 현실이요 일이라는 점이었죠.


사과의 주산지가 모여 있는 경상북도에 가면, 길 따라 사과 밭이 지천입니다. 5~6월이면 가지마다 풋풋한 아기 사과들이 왁자지껄 아우성이죠. 마치 별의 정령들이 알알이 숨어든 것처럼 자연의 신비가 사과밭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농부들은 열매솎기로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사과 열매는 대여섯 개씩 한 무더기로 열리는데, 가운데 한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려 냅니다. 한 알 한 알 모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하지만, 농부는 냉정하게 솎아 내야만 합니다. 이듬해 해거리를 막고 가을에 더 크고 빛나는 사과를 얻기 위해서죠.


열매솎기가 마무리될 즈음, 손해평가사는 사과 개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수확기에 상품으로 출하할 사과 개수를 미리 파악해 둘 목적입니다. 사과를 세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울까 싶은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게 생각처럼 수월하지 않습니다. 통상 사과나무 200~300그루를 재배하는 과수원이면, 사과열매는 수만 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꼬마 사과라서 크기도 조그맣고, 무성한 이파리 사이사이 숨어 있어서 한동안 숨바꼭질을 해야 합니다.


몇 만개의 사과를 빠짐없이 세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손꼽아가며 세기엔 엄두를 내기 힘든 숫자이니까요. 인류는 큰 수를 다루기 위해 아라비아 숫자 같은 기호체계를 만들었고, 다양한 셈법과 회계, 통계 같은 학문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손해평가사는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이기를 적절히 활용하여 수만 개의 사과를 너끈히 세어 냅니다. 수를 세야 하는 과일 목록엔 비단 사과뿐 아니라, 시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배, 감, 포도, 복숭아, 자두 등을 망라합니다.


예전엔 밤하늘의 별을 모두 세겠다는 설익은 용기를 여러 차례 내 봤지만, 매번 헛일이었습니다. 기껏 삼백 개 정도 세다가 포기하기 일쑤였으니까요. 하지만 손해평가사가 된 후 수만 개의 사과를 꿋꿋하게 세는 경험이 쌓이면서, 이젠 별의 개수도 거뜬히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초여름이면 손해평가사는 숫자 세는 도구인 계수기를 점검하고, 활동이 자유로운 옷차림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사과를 더 정확히, 더 빨리 세기 위한 몸풀기에 나섭니다. 남들은 피서계획 세우느라 여념이 없을  무렵, 사과밭에서는 사과를 세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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