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평가사, 경북 영덕 고추조사 배정합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영덕읍 사라모텔로 가세요. 출발 전에 현지 선임평가사에게 연락하세요.”
해외여행 티켓을 받은 기분이다.잽싸게 댓글로 출동하겠다고 알려주자. 회신이 늦어지면 다음 순번 대기자로넘어갈지 모른다. 하트 표정 이모티콘도 덤으로 날리자.
“넵, 감사합니다. 철저히 준비해서 맡은 바 임무를 사수하겠습니다.”
댓글 내용은 괜찮은 건가? 어이구, 엔도르핀 과잉이었나 보다. 깍두기들 세계에서나 쓸 댓글을 단 것 같다.지우고 새로 쓸까? 이 밴드는 경기지회 소속 손해평가사들 눈 삼백 개가 땡글땡글 지켜보는 곳인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 친구는 말투가 군바리 물을 세게 마신 모양이네’ 하고 군출신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문자와 댓글이 소통의 주류가 된 지 오래다. 짧은 단문으로 사람 됨됨이 전체를 넘겨짚는 세상이다.
에이, 그만 두자. 댓글은 이미 훨훨 날아가 버렸다. 벌써 여러 명이 저 댓글을 읽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지우고 다시 쓰면 오히려 싱거운 놈이 된다. 군대식의 깍듯한 댓글이 투철한 책임감과 올바른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을 수도 있다. 그래, 맘 편히 생각하자.
그건 그렇고, 왜 하필 영덕이지? 경기도에서 가까운 충북 제천이나 보은을 기대했는데, 제일 먼 영덕을 배정하다니. 차로 1시간은 더 가야 할 텐데,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추가되는 기름값만 얼마인가. 일감이 말라버린 이 마당에 가까운 지역으로 바꿔달라 할 수도 없고,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은 아니다. 그래,투덜대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잊어버리자.
영덕에 도착하면 선임평가사와 접선하고, 내일 바로 고추 피해조사 돌입해야 한다. 준비물은 다 챙겼던가. 계수기와 장화는 어제 챙겼고, 모자랑 작업복도 쇼핑백에 미리 넣어 두었다. 문서철이랑 볼펜, 굵은 사인펜은 도구함에서 쿨쿨 자고 있으니까, 필요한 장비는 얼추 준비가 끝났다.
오늘 출발하면 낯선 곳에서 일주일 이상 묵어야 한다. 그동안 입을 바지, 상의, 속옷, 양말, 세면도구, 스킨, 로션, 선크림, 면도기, 영양제, 상비약까지 꼼꼼히 챙기자. 지난번 나주 낙과피해 조사 때는 고혈압약을 빠뜨려서, 처방전 받아 약국 찾아 헤매느라 무진장 애먹었다. 아 참 아침거리도 챙겨 가야 한다. 지방에는 아침에 문 여는 식당이 없다. 아침끼니를 거른 날은 점심 전에 파김치가 된다. 누룽지와 사발면 넉넉히 챙기자.
같이 일할 선임평가사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번 신입 평가사를 대상으로 소집 교육할 때, 참관인으로 왔던 분 같다. 먼발치여서 기억은 흐릿하지만, 60대 초반에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눈꼬리가 서 있어서억센 인상이었던 듯하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까칠한 사람 만나면 일주일 내내 붙어 지내야 하는데, 진저리 나게 피곤해진다. 이 일 계속하다 보면 별별 인간 다 만날 텐데,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그래, 부딪혀 보는 거야.
선임평가사에게 사전에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얼른 전화부터 걸어보자.
“아, 이 평가사, 오늘 내려올 거죠?” 놀랍다, 저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본다.
“네, 반갑습니다. 조금 있다 출발하려고요”
“고추 조사는 처음이죠? 어렵지 않으니까 마음 편하게 오세요. 이따 도착하면 같이 저녁 먹으면서,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운전조심하고, 저녁에 봐요.”
“감사합니다. 영덕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휴, 무던한 양반 같다. 내 휴대폰 번호를 미리 저장할 줄 아는 배려심도 있고, 목소리도 차분해서 여유가 느껴진다. 자, 이제 내비게이션 켜고 출발해 볼까. 4시간 넘게 달려야 한다. 영덕 고추들아 조금만 기다려라, 곧 만나러 갈게. 떠나자, 낯선 땅으로.
손해평가사는 벼, 고추, 마늘 같은 농작물 재배지에서 피해가 발생해야 일감을 받습니다. 업무 배정을 받을 때까지 5분 대기조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죠. 어디로 가게 될지, 누구와 일하게 될지도 미리 알 기 어렵습니다.그러다 보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장기간 동고동락하며 조사를 진행합니다.처음에는 어색하고 거북하지만, 익숙해지면 나름 재미와 스릴이 있습니다. 조사 지역을 구석구석 돌면서, 그 고장에 대한 애향심도 생겨나고요. 시금털털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분, 일 속에서 신선한 경험을 맛보고 싶은 분에게, 손해평가사는 신세계 그 자체입니다.